이영희

지난 겨울은 하도 추워서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더니 봄 바람이 어루만지고 지나간 가지에는 꽃망울이 부풀고 죽은듯하던 대지 위에 새싹들이 움틉니다. 얼어붙은 그 단단한 땅을 뚫고 올라온 생명력에 감탄을 하며 변함없는 대자연의 섭리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입춘이 지나면서 꽃샘추위도 아랑곳없이 잠두봉을 거닐며 물이 오르는 초목들을 관찰하는 것이 새봄을 맞는 즐거운 일과가 되었습니다.

인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하니 지금 겨울을 지나며 움츠리고 있는 사람에게 따스한 봄은 이렇게 어김없이 온다고 알려주며 힘을 내라고 합니다.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기쁨에 취해있는 왕이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석공에게 간단한 문구를 새겨오라고 한 바 "다 지나가려니"라고 새겨왔다는 일화가 떠오르는군요.

잠두봉 입구에는 새 모양의 전지를 한 향나무 사이로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가 조형미를 느끼게 합니다. 인근에 목공을 하는 분의 솜씨인데 그 정성에 매번 찬사를 보냅니다.

아직은 몇 송이만 이른 봄을 달고 있는 개나리 울타리에 노란 빛이 더해지고 영산홍이 피어나면 수많은 꽃들도 만발하여 예년처럼 행인들의 사진 촬영 장소가 될 것입니다.

잠두봉을 오르며 이 아름다운 동네로 이사를 온 6년 전을 생각합니다.

둘 다 직장이 가까운 여기서 살다가 퇴직하면 등산을 할 수 있는 산 밑으로 갈 예정이라 했더니 잠두봉이 등산로로 그만이라고 그랬지요.

속리산 정기가 갈무리되어 잠두봉 아래 양손을 펴고 와혈 명당을 만든 동네라고 하던 풍수지리 학자의 말이 솔깃했었습니다. 먼저 살던 동네에도 아파트 화단을 빼어나게 가꾸어 '요정의 집'이라 부른 집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이런 아름다움까지 덤으로 얻는 동네에 살게 되어 삶의 고마운 운치를 느낍니다.

크게 높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잠두봉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개나리 꽃길과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가 하면 복사꽃도 볼 수 있고 출렁 다리도 있습니다.

잠두봉을 내려가면 이웃 아파트 단지가 있는 평지를 거쳐 매봉산과 구룡산으로 가게 되는데 현수막을 쳐다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대화를 듣습니다.

"저걸 보고 모처럼 사러 갔더니 찾는 옷은 정가에 팔고, 철 지난 옷만 바겐세일을 하더라."라는 말에 상대방 노인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머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삶이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내려가야 하는 등산과도 흡사하지만 퇴직을 하면 바로 50퍼센트 바겐세일이 되더라는 선배의 말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도 퇴직을 했으니 하면서 더 말하려다 보니 괜스레 씁쓸해질 것 같아 얼버무리고 맙니다.

바겐세일이 되었겠지만 그런 아픔을 겪고도 등산로를 부부가 이렇게 손잡고 거닐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생각하며 이내 기분 전환을 합니다.

흔히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없고 다 좋으면 사람들이 많아서 발길들일 틈이 없다고 하지요. 고통은 행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고 부정적인 머피의 법칙이 있으면 긍정적인 셀리의 법칙이 있으니 셀리의 법칙 이어가기를 합니다.

"사려고 하는 옷이 내가 방문한 날부터 신기하게도 세일을 하고 택시를 기다리다 안 와서 길을 건너오니 바로 택시가 온다. 내가 사니 올라가고 내가 파니 내려가더라. 모처럼 우산을 준비했는데 멀쩡한 하늘에서 비가 왔다"라는 등 뒤집어 생각하면 다 좋은 점이 된다는 이치를 생각하며 마주 보고 웃습니다.

따스한 봄바람 때문인지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옷차림도 더 밝아 보이고 주고받는 대화도 경쾌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오고 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방에 나무뿌리가 드러난 평탄한 길이 여러 갈래인 것을 보면 본디 길이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이 오고갔음을 알 수 있지요.

아직은 잎이 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가족의 얼굴같이 부스스하고 편안한 숲이지만 우리에게 계절의 기쁨과 그 은밀한 속 뜰을 한 자락씩 보여주리라는 희망으로 발길이 가볍습니다.

봉우리가 막 터지려는 생강나무를 보니 멋쩍은 웃음이 납니다. 그 나무를 동백꽃이라고 하는 어머니한테 생각나무라고 하면서 동백꽃은 노란색이 아니고 빨갛다고 우겼었지요.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고 나서야 강원도에서는 그 나무를 동백나무라고 하고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나서 생강 나무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런 것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살아오면서 모르고 잘못한 일이 얼마나 많을지요.

알고 한 잘못은 마음으로라도 미안한 생각을 갖는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가슴을 아리게 한 일들도 있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젊은 혈기에 앞으로 나아갈 목표의식으로 주위를 좀 더 배려하지 못했음이 걸립니다.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뿌리까지 짓밟히면서도 숲은 안식과 치유를 제공합니다. 벌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그 미물만큼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있으니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이 국토 이 대자연이야 대대손손 후손에게 물려줄 땅인데 올라온 나무뿌리를 밟고 다니는 것은 다반사이고 쓰레기를 버리는 이도 있습니다.

뿌리를 흙 속에 묻어주지는 못하지만 먼저 보는 이가 줍는 것이 이 대자연을 즐기는 기본이라 생각하며 비닐 주머니를 챙깁니다.

쓰레기를 주우며 돌아오는 길,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더니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내가 젊었을 때 지금 내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였나를 생각하며 봄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설렘을 잠재우지만 역시 봄은 설레는 꿈이고 희망입니다.

별 준비 없이 홀가분하게 오가며 대화도 나누고 운치도 느끼는 잠두봉같이 너그럽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타인을 배려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약력

▶충북 제천 출생

▶1998년 한맥 문학 신인상

▶청풍문학회 회장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한맥문학회 회원. 전국공무원문학회 회원

▶충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지원단장 역임

▶nandasin12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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