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아름다운 길의 가치는 두리번거리게 하는데 있다. 직선의 길이 아니라 곡선의 길, 이따금 언덕이 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풍경을 호흡하고 느림의 미학을 담으면 좋다. 꽃들의 잔치에 매료되려면 북풍한설을 뚫고 피어난 매화쯤은 되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꽃 매화.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아름다움, 가난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 추운 겨울의 시련을 이겨내고 피어난 매화의 정신과 향과 결을 따라 자박자박 걸으면 좋다.

봄꽃이 지고 여름이 오기 전에 난초의 향기에 젖으면 이 또한 삶의 행복이 아닐까. 가람은 난초의 여리고 순한 마음과 자신의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 정조를 높이 평가하면서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볼까"라며 난초의 향을 엿보는 설렘을 노래했다. 매월당 김시습과 악성 박연, 그리고 다산 정약용도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난초의 아름다움을 시심에 담지 않았던가.

가을의 전령은 단연 국화다. 지천에 피었다 지는 꽃들이 얼마나 많을까만 그 중 들판에 다소곳이 피어난 국화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국화옆에 서자. 코끝이 징하게 향기로운 꽃들의 잔치에 눈물이라도 울컥 쏟아질 것 같다. 그래서 미당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개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며 국화에 대한 순정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각다분한 도시의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대나무 숲에서 자신을 온전히 부려놓아야 한다. 죽순이 자라 대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마디와 마디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대나무 숲에 서면 내 몸에서 대나무처럼 소리가 난다. 물욕의 세상, 비린내 나는 삶의 파편들을 날려 보내고 맑고 향기로운 대숲의 풍경으로 목욕을 한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만파식적이라는 신비의 피리 하나 간직하면 좋겠다.

로뎅은 "세상에 완전한 창조란 없다"고 말했는데 매난국죽(梅蘭菊竹)이야말로 완전한 창조, 불멸의 향기가 아닐까. 이어령은 중국의 대륙문화, 일본의 해양문화, 한국의 반도문화의 문화적 다양성을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들 세 나라가 문화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원형이 바로 매난국죽이라고 했다. 매화는 여인의 절개요, 난은 선비의 기개며, 국화는 선비의 기품이고, 대나무는 충신의 지조이자 올곧음이다. 매난국죽이야말로 동아시아 문화의 근원이자 정신이며 세계라는 것.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뽑히거나 밟힐지 알 수 없는 지난한 삶, 영원할 것 같은 생명도 지나고 나면 한 줌의 흙이고 찰나에 불과한 것을 애태우며 끈질기게 버텨오지 않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지나온 삶이 곧 기적의 역사라고 했다. 희망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언덕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난국죽의 생명을 춤과 노래로, 시와 소설로, 그림과 조소로, 도자기와 민화로, 그리고 삶이라는 거대한 퍼포먼스로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아픔을 딛고 영원을 꿈꾸며 더 큰 행복을 찾기 위해서다. 선비의 붓끝에는 사군자의 먹향이 가득하고, 지난한 삶의 여정이 눈물겹다. 그렇지만 운명으로 달관하고 비애로 달관하며 아픔으로 단련돼 온 상처속에 새 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며 향기가 끼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물의 생명과 그것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생명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지 우매한 질문을 던져본다. 식물들도 자신들의 짧은 생을 살다가는 것이고, 인간들도 저마다의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간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선가 만나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젊음과 늙음을 순환시킨다. 지금 우리가 길 위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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