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4월에게 '잎새달'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주었다. 예쁘고 상큼한 잎새달, 모처럼 봄볕다운 햇살이 나들이 길을 연다. 환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앉은 정송강사를 찾았다. 문화재 관리 봉사를 나선 향토사연구회 어르신들과의 동행길이다.

향토사 연구회는 지역의 사학에 관한 연구와 문화재, 마을사 등 잊혀져가는 사료를 발굴 수집하여 기록물로 엮어내는 일을 주로 하는 모임체이다. 진천문인협회와 사무실이 나란하고, 그간 자주 소통을 해 온 터라 올해부터 자연스럽게 회원으로 합류가 됐다. 대부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지역 어른들이라 따라 나서기만하면 배울 것이 무진하다.

오늘의 행보는 며칠 후 실시될 송강제향을 앞두고 미리 둘러봄인가 보다.

송강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시인이며 정치가라는 두 줄기 굵직한 맥을 잡고 한 시대를 풍미한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 놓은 사당이다.

그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며 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대 문호요, 정치적으로는 좌의정까지 지낸 서인의 영수다. 당쟁의 전면에서 부침을 거듭한 정치 풍운아답게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은 많은 이야기를 전설처럼 낳고 있다.

정송강사에 도착하니 400년 노거수 느티나무가 제일 먼저 반긴다. 언제 봐도 수려한 모습에 위엄을 갖추고 당당히 서서 사적의 격을 높이고 있다. 얼핏 선생의 풍모가 이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스친다. 홍살문 너머 따사로운 햇볕을 받고 있는 고즈넉한 경내는 그 어느 때보다 안온한 느낌이다.

선생은 강원, 전라,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과 훈민가 등 주옥같은 글을 빚어냈다. 낙향한 뒤에도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없이 많은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 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권주가를 보면 호방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융통성 없이 강직한 성품이 엿보이는가 하면, 두주불사 풍류가객의 풍모가 툭툭 불거져 시가 되어 나온다. 각기 다른 품결과 글맛이 느껴진다. 문단의 거봉이면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삶에 왠지 모르게 애잔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문인으로서의 동질감 때문인가.

경내로 들어서기 전, 매화꽃 향기를 머금고 다소곳이 서 있는 '훈민가'와 '관동별곡' 시비를 대하면서 왼편으로 굽어진 길로 들어섰다. 송강 묘소 가는 300미터 오솔길이다. 대뜸 시작부터 가파른 것이 칼칼했을 그의 성품을 엿보는 듯하다.

동행한 종중 어른은 이 오름길로 경운기를 이용하여 묘제의 제물을 실어 올렸다 한다. 말만 들어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일일이 등짐으로 나르던 것을 요즈음에는 등짐 질 사람도 없고 위험해도 경운기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쪽으로 승용차 길이 닿게 겨우 길 하나를 새로 닦아 놔서 이번부터는 제물 나르기가 용이해 졌다는 등 이야기자락을 오솔길에 신나게 깔고 있다.

숲길 양옆으로 키 작은 녀석들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잎눈이 막 트이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와그르르 터져 나올 기세다. 산새들 짹째글대는 소리가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 오솔길부터 일대가 소나무 군락을 이룬 묘소에 이르니 큼지막한 봉분이 둘이다. 송강선생과 그의 둘째 아들이다.

기실, 환희산자락을 깔고 누워 있는 선생은 우리 진천군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1536년 한양에서 태어나 강화도에서 별세하였고, 고향은 전남 담양으로 꼽힌다. 살아생전 함경도부터 전라도까지 관직을 따라 두루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진천과 인연이 닿았던 부분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리지역에 묘 터를 잡으면서 영일정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암 송시열 선생의 덕분이다.

괴산군 출신의 우암선생은 외려 진천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인연이 꽤 깊은 듯싶다. 백곡호를 끼고 있는 식파정에 올라 이득곤, 최명길 등 문사들과 그곳의 풍유를 읊었던 기록이 지금도 제영으로 걸려 있으니 말이다.

정씨 문중의 한 어른에 의하면, 어느 날 우암선생이 청주 쪽에서 진천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에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단다.

풍수지리에 능한 우암선생의 눈에 저 멀리 산세 좋은 지역에 길한 묘 터가 눈에 들더라는 것이다. 평소 송강선생의 유택을 좀 더 좋은 곳에 모시고자 하던 차에 길지를 짚어주니 그의 문중에서 쾌히 승낙하고, 일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그의 자손 중 정양이라는 사람은 관직을 강등하면서까지 진천고을로 부임을 자처하고 들어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에 있던 묘를 이장시키고 사우를 건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환희산자락 지금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환희산(歡喜山)은 '기쁨을 안겨주는 산'이라는 의미와 한편으로는 높은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늘산'이 변하여 그리 부르게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해발 402미터의 높이를 하늘산이라 불렀다는 것은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이고, 우암선생에 의해 이름 붙여졌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전혀 연고가 없는 곳으로 유택을 이장해 올 정도로 길지를 품고 있는 산세가 우암선생의 눈에는 분명 기쁨을 안겨주는 산의 기운이 느껴졌을 게다.

유명조선 좌의정인성부원군 시문청 호송강 정공철지묘 정경부인 문화유씨부좌I(有明朝鮮 左議政寅城府院君 諡文淸號松江鄭公澈之墓 貞敬夫人 文化柳氏?左) 묘비가 특이하게 통석으로 서있다.

문안을 드리려고 묘소 앞에 엎드리고 보니 '아하! 빈손이다.'

재 넘어 친구네 집에 술이 익었다는 말을 듣고 그 밤으로 달려간 선생이 아니었던가.

"한잔하고 또 한잔 하세/ 그때마다 꽃잎 하나씩 떼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고 나면/ 지게 위에 거적 덮여 메어가나/ 꽃상여에 얹혀 만인의 통곡 속에 가나/ 잡풀 무성한 곳에 묻히고 나면/ 그 누가 한잔하자 권할꼬." 선생이 읊은 '장진주사' 한 구절이 아지랑이처럼 오른다.

술 한 잔에 꽃잎하나 떼어 안주 삼는 그 풍류……. 오죽 술이 달았으면, "이 잔으로 하루 꼭 한잔씩만 마시게."

선조가 절주를 당부하며 하사한 은배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 큼지막이 잔을 키워 마셨을까. 거역할 수 없이 딱 한잔만 마셔야 하니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려면 잔이라도 커야 했을 터. 은잔을 두드려 잔을 키우려는 그 발상은 송강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는 진정 멋을 아는 대 문호임이 분명하다. 그런 선생에게 난 술 한 잔 부어 올릴 생각도 못하고 빈손이라니…….

꿇어앉은 무릎 앞에 할미꽃이 다소곳이 미소 짓는다. '괜찮다' 덮어 주기라도 하듯 순한 눈빛으로 도닥이는 소리가 가만하다.

슬픈 전설을 안고 있는 할미꽃, 하얀 솜털로 가득 덮인 몸 안에서 피워내는 자줏빛 꽃잎이 곱다. 비로드 같은 속살은 분명 모든 허물을 덮어주려는 할머니의 마음일 게다. 두 딸에게 쫓겨나 막내딸에게로 향하다가 눈보라 언덕에서 죽음을 맞은 늙은 어머니의 넋이 할미꽃으로 피어났다 하지 않던가.

허리한번 펴보지 못한 우리네 어머니가 머무는 무덤가, 햇볕이 따사롭다.

약력

▶충북 진천출생

▶2003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원, 진천문인협회 회원

▶생거진천신문 편집위원

▶충북문인협회 편집부장

▶前 진천군의원

▶저서; 수필집 '순간이 둥지를 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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