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이야기가있는 도보여행] <5>지리산 시선둘레길
성찰하며 인내하는 오르막 숲길

누군가 지리산둘레길을 "느리게 성찰하고 느끼며 애둘러가는 수평의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선둘레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있지만 대체로 꾸준히 올라가야 하는 수직의 길이다. 이 길은 지리산 능선의 팔랑치가 종착지다. 그래서 신선둘레길은 도보여행이 아니라 등산하는 마음가짐으로 올라가야 한다.

첫 걸음은 남원시 산내면 원천마을에서 시작된다. 지리산 둘레길의 출발점인 매동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다. 원천마을에서 바래봉을 향해 가지친길이 신선둘레길이다. 들머리는 싱겁다. 원천마을의 포장길을 이리저리 돌아 올라간다. 유난히 뽀얀꽃잎이 춤을 추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마을이다. 고냉지 사과농사가 마을의 주수입원인듯 했다. 하기야 지리산중턱에서 무슨 농사를 지을수 있을까. 마을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경사가 있다. 하지만 산 초입에서 뒤를 돌아 천년고찰 실상사쪽을 바라보면 제석봉과 중봉, 하봉을 거느린 천왕봉이 늠름하게 솟아있는 경관이 일품이다.

마을이 한눈이 보이는 팔각정에서 잠시 땀을 훔쳤다. 4월의 바람은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팔랑치마을을 가는 길은 거칠지는 않았지만 드믄드믄 고바위가 많아서 인지 쉬운길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울고넘는 눈물고개'가 있다. 하지만 붉은 황톳길은 빛바랜 솔잎에 덮혀 푹신한 느낌이었다. 쭉쭉 뻗은 적송숲 사이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긴터널을 빠져나온듯 숲속을 벗어나 시야가 확트인 산허리에 들어선것이 '팔랑마을'이다. 한자로는 여덟팔(八) 사내랑(郞) 자를 쓰며, 이름 그대로 아들을 많이 낳는 마을로 통한다. 한때는 초등학교 분교가 들어설 만큼 번성한 마을이었으나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지리산 인근의 독가촌들이 산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젠 7가구만 달랑 남았다.

마을앞에 지리산자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그 산엔 산벚꽃이 아직도 제철을 만난듯 환하게 피었다. 기온이 낮기 때문이다. 해발 700m의 고지대 마을은 한여름에도 서늘해 반팔을 입고 온 이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낼 정도라고 한다. 당연히 모기도 없다. 예전엔 사내아이들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이젠 민박을 청하는 등산객들이 훨씬 많다고 했다.

마을에서 지리산 풍경을 감상하며 잠시 숨을 고른뒤 팔랑치로 향했다. 팔랑마을을 출발한 산길은 바래봉에서 남쪽으로 1.5㎞쯤에 위치한 팔랑치(1010m)로 가 닿는다. 마을사람은 1시간 거리라고 일러줬지만 그 시간이 고행길이었다. 팔랑치에서 능선을 타고 바래봉까지 1.5km에 달하는 철쭉길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면 걷기가 쉽지않은 길이었다. 오로지 오르막 직진코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오아시스같은 숲속의 작은 계곡이 한숨을 돌리게 했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 같다고 해 이름 붙여진 지리산 바래봉은 팔랑치를 거쳐야 가는 봉우리다. 완만하고 순한 능선은 봄이 되면 울긋불긋 꽃 대궐로 변한다. 사람 허리 정도 높이의 철쭉이 무리 지어 군락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가꿔놓은 것 같아 4월하순부터 한달간 철쪽제가 열린다.

1970년대, 이 일대 '면양목장'의 양들이 '안드로메도톡신'이라는 독성이 꽃과 잎에 깃든 철쭉만 남겨놓고 잡목과 풀을 모두 먹어 치우는 바람에 철쭉군락이 형성됐다는 말도 있다. 지리산 철쭉은 꽃잎이 크고 색이 선명하다. 5월에 접어들면 초록으로 뒤덮인 웅장한 지리산 자락과 소담하게 자리 잡은 진분홍빛 철쭉이 마치 하늘정원처럼 화려한 꽃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철쭉은 쉽게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시라도 일찍 보고자 하는 성급한 사람들의 조급함을 꼬집는듯 멍울도 터지지 않았다. 철쭉은 봄과 여름을 잇는 가교(架橋)다. 철쭉의 열반을 신호로 계절은 늦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지만 입하(入夏)도 한참 남은 4월말에 눈부신 철쭉을 기대하긴 무리다.

힘겹게 도달한 팔랑치에서 설익은 철쭉은 사람들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나마 하산길에서 본 철쭉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그 와중에도 지리산철쭉제는 개막했는데 비래봉철쭉을 보기 위해 지리산을 올라가려면 좀더 참는게 나을지 모른다. 산밑에서 출발해 물감을 흩뿌리듯 서서히 산자락을 물들이며 올라가는 진분홍빛은 5월중 중순이면 바래봉 일대를 붉은빛으로 수놓을 것이다./대기자(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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