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 아침에 뉴질랜드로부터 시 한편이 날아왔다.

-고운 하늘 별자리 떨어지네/ 하나님 보내신 별자리/ 참 아름답게 흘러간다/

매운 배추 찢어 고운이 입에 넣던/ 어머니 손 맛 참 맛있고/

그리운 고향 초가집 가고 싶다/ 아버지 진지 드시던 금 숟가락도/

세월이 지나 은 숟가락 되고/ 새벽에 울던 닭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흰머리 되신 우리 어버이 천국으로 가실 때/ 그 모습 너무나도 그립고 또 그립다.-

여덟 살짜리 외손자 준섭이가 '어버이'라는 제목을 달아 쓴 글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다. 앙증맞은 입술로 동요나 부를 어린 것이 대체 '고운 하늘 별자리' 라는 시구를 어디에서 찾아냈단 말인가.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는다.

일 년 전 딸네 집에 가서 외손자 두 놈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휴식 시간에 놈들이 가요 '전선야곡'을 불렀다. 전쟁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부른 노래라며 배우기를 원하여 가르쳐 준 노래이다.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 '전선야곡' 3절과 4절이 휴대폰에 찍혀왔다. 준섭이가 지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이 / 밝은 해 달 같았소 / 아아아아 아아 / 그 눈물 등불 같소∼

영락없이 전선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애절한 가사였다. 나는 이 가사로 여러 번 거듭하여 그 노래를 불렀다.

준섭이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놈의 새 작품이 사흘이 멀다 하고 날아왔다. 할아비의 뜨거운 찬사에 힘을 얻은 준섭이는 숨겨졌던 신통력을 거침없이 분출했다.

∼낙엽이 선죽교 아래 물가에 앉아 흘러간다∼(낙엽)

∼어떤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가 나 같은 흙으로 돌아갔을 때 /나에게 황금꽃이 되었다∼(씨앗)

∼검은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빨간 꽃송이들∼(갈리폴리 전투)

∼겨울바람은 추운 털옷으로 감싸고/ 잘린 얼음이 내려오네요∼(바람)

∼꽃비가 내리는 초가집 아래서/ 저 먼 바다 끝에 있는 해를 보고/ 나는 꿈보다 더 아름다운 아침 종소리를 듣는다∼(백야)

한글을 스스로 터득했고 앉으면 책을 읽어'책벌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놈이지만 실로 범상치가 않다. 입이 근지러워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아니겠느냐' 며 의외의 칭찬이 내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정작 그 칭찬은 얘기책을 구성진 가락으로 읽어주시던 내 부친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날 아내와 함께 부친이 계신 요양원에 갔다. 마침 어버이날을 맞아 흥겨운 노래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래방 기기에서 반주가 흘러나오고 초대 받은 소리꾼이 흥을 돋우니 신명 좋은 노인들이 어깨를 씰룩이며 한데 어울려 춤을 춘다. 부모를 만나러 온 가족들도 돌려가며 마이크를 잡고 한 곡조씩 목청을 높인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몇 번을 사양했지만 결국 한 곡을 불러야 했다.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가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돌아갔다. '애수의 소야곡', '눈물 젖은 두만강', '비 내리는 고모령'…… 모두 슬픈 사연을 안은 노래여서 부르다가 목이 멜 것 같아 '울고 넘는 박달재'를 골랐다. 가끔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노래이다.

어릴 적 추석 명절날 밤이면 동네 한 복판에 차려진 가설무대에서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신파극을 했다. 그 날 연극 막간에 아버지가 깜짝 등장하여 노래를 하셨다. 한 쪽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왕 서방 연서'를 부르면 예서제서 "재창이요!"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서슴없이 앙코르를 받아 '장모님 전 상서'를 부르면 동네가 떠나갈 듯 하던 박수갈채, 그것은 어린 나에게 감동이며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었다.

부전자전인가, 나도 노래를 즐겨 불렀고 아버지는 노래 잘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여기까지 부르고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겨드렸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아버지는 호흡이 달려 음정이 처졌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이렇게 마지막 소절은 아버지와 내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불렀다.

구십에 둘을 더한 연세, 알츠하이머를 앓아 사시나무 떨듯 하는 양손으로 겨우 박수하며 따라 부르시다가 박자를 놓치고 허둥대신다. 아버지를 위로해 드린다고 불렀는데 왜 가슴 한켠이 ●! 하고 내려앉는가. 그 옛날 신명나던 당신의 가락이 이젠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쳐 부르고 싶은 추억이 되었다.

아버지의 노래가 내 노래되었더니 외손자의 시가 되었고, 아버지의 얘기책을 내가 읽었더니 지금 그 책을 외손자가 즐겨 읽는다.

"준섭아, 40 편의 시를 써 보내어라. 할아버지가 시집을 내 주마." 이 약속에 놈은 지금 한껏 고무되어 있고, 나 또한 대기만성의 교훈을 접어두고 조급해 하고 있다. 고운 하늘 별자리에 여덟 살짜리 꼬마 시인의 노래를 띄울 날이 사뭇 기다려진다.

약력

▶'문학공간' 수필, 시 등단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연대 회원

▶대한기독문인회 회장

▶수필샘회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저서 수필집 '별처럼 산처럼' 등

▶youinch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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