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뉴 아이콘-젓가락]⑥역사속의 젓가락
가장 오래된 공주 무령왕릉 '동제(銅製) 숟가락과 젓가락'

음식을 먹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숟가락, 젓가락은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젓가락의 역사는 3천여 년전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반에는 제례행사에 사용됐다가 한나라 초기에 식사도구로 쓰였다. 우리나라에는 1천800여 년전 신라시대, 일본에서는 1천500여 년전 보급됐다. 중국과 일본의 젓가락은 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한국은 놋쇠, 은 등을 사용해 만들었다. 이는 국물문화의 발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있다.

우리나라 숟가락, 젓가락 유물의 기원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원삼국시대의 국자모양 소형 토제품이 있고, 황해도 황주군 흑교리에서 한국식 동검과 함께 발견된 국자모양의 숟가락이 있다.

◆돋을선 등 넣어 백제금속공예의 아름다움 표현

현재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동제(銅製)숟가락과 젓가락'이다.

1971년 7월 5일 공주 송산리 제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발굴됐고, 그 곳에서 금으로 만든 관 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화려한 무늬와 백제의 이상향을 담은 동탁은진 등 모두 108종 3천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이들 유물은 정교한 제작기술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금속공예품들로 백제가 문화강국임을 확인시켜 줬는데, 긴 타원형에 삼각형 자루가 달린 3점의 숟가락과 2점의 젓가락도 그 중의 하나였다.

숟가락은 은행알 모양을 연상시키는 몸체에 끝으로 가면서 기다란 삼각형태를 이루고 있는 손잡이를 가지고 있으며, 젓가락은 지름면이 각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왕의 숟가락에는 여러 줄의 돋을 선과 세로 선을 넣어 화려하게 장식해 왕의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또 젓가락 손잡이 부분에는 끈으로 묶을 수 있는 둥근 고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무령왕릉이 무령왕(462년~523년)이 죽은 뒤 축조한 무덤임을 감안하면 이들 숟가락과 젓가락은 6세기 초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부터 금속사용 … 이전에는 나무로 만들어

출토유물로 살펴볼 때, 금속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만든 것은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이며, 이전 시기에는 주로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이 사용됐다. 이들 금속제 수저는 주로 지배계급이나 상류층 귀족들만이 제한적으로 사용했고, 일반인들은 여전히 나무로 만든 것을 썼기 때문에 젓가락 유물이 숟가락의 10분의 1수준 밖에 출토되지 않은 이유다.

통일신라시대 숟가락은 부여 부소산과 경주 안압지 출토품처럼 몸체가 원형이나 타원을 이루며 자루의 단면은 반원통형, 사각형, 삼각형 등 부위에 따라 다르다.

고려시대의 숟가락은 고려 인종 장릉에서 발견된 은제 숟가락처럼 통일신라시대 숟가락의 형태와 유사한 것도 있지만 자루의 끝이 제비의 꼬리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고 측면에서 보면 S자형으로 휜 연미형 숟가락이 유행했다. 젓가락의 길이도 길어지고 대나무 마디모양의 장식이 표현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숟가락이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몸체는 음식을 먹기 불편할 정도로 길어지며 손잡이도 지나치게 휘어져 있다.

◆육류문화 확산되며 없어서는 안될 필수도구로

우리나라에서 숟가락이 본격적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이다. 숟가락은 11세기부터 고려의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보이며, 13세기부터 부장품으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는 고려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 문화권과의 대외관계와 직결된다. 요나라와의 교류로 고려의 부장품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이며, 식단에 국이 등장한 것은 숟가락을 필수 식사도구로 만들었다. 이어 금나라, 몽골의 침입과 원나라의 지배를 겪으면서 육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숟가락은 일상의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생 쓰던 숟가락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는 부장풍습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동젓가락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원주형이고, 원주 표면에 꽃과 나무덩굴, 나비와 벌 등의 무늬를 장식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손잡이 부분이 사작형으로 시작해 집는 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게 만든 것도 많다. 고려 청동젓가락의 길이는 20~25cm가 가장 많고 40cm가 넘는 것도 있다.

고려 초기의 것은 숟가락의 자루가 심하게 휘어져 있고, 중기의 것은 자루 끝이 제비 꼬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보이며 실용성이 강조되고 있다. 숟가락 면은 나무잎과 같은 타원형을 이루고 수저의 윗부분에 길한 의미의 글자나 꽃을 칠보로 입혀 실용성과 심미성을 가진 일상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를 거듭해 온 숟가락과 젓가락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속으로 깊이 들어와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이제는 문화상품, 교육자원, 문화산업, 관광산업 콘텐츠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 송창희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저승에서도 이 젓가락으로 배고프지 않게 살아라"

자식사랑 담은 '제숙공처 젓가락' 청주 출토



죽은 아들을 위하는 절절한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제숙공처' 젓가락. 죽은 아들이 저승에서도 굶지않고 배부르게 살기를 기원한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보여주는 젓가락이 우리 고장 청주에서 출토됐다.

'齊肅公妻 造○世亡子(제숙공의 처가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다)'. 청주시 명암동 고려무덤에서 출토된 이 청동 젓가락은 제숙공의 부인이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점각되어 있다.

동반 출토된 중국 동전 등으로 볼때 무덤의 주인은 13세기 전반 고위 품관을 역임한 사람의 아들로 추정된다. 고위 관료의 가족이 청주에 묻혔다는 점에서 종래 개경 인근에 조성되던 품관층의 무덤이 지방으로 확산된 사례이거나, 무심집권기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퇴거한 경우가 아닌가 예측하고 있다.

이 젓가락과 함께 출토된 먹(墨)은 현존 유일의 '고려 먹'이다. 먹집게로 집은 흔적이 있고 아래쪽이 갈려 있는 것으로 보아 생시에 쓰던 먹임을 알 수 있다. 또 파도무늬로 둘러 싸인 가운데 '단산오(옥)'라는 양각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단양의 특산 먹중 최상품을 '단산오옥'이라 한다고 적혀있는 것을 볼 때, 이 먹의 출토로 '단산오옥'이란 이름이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수량적으로도 많고 현재까지 일상에서 쓰는 도구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연구가 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전국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 숟가락, 젓가락 유물이 얼마나 되는지도 체계적으로 연구가 되지 않은 단계이다. 정확한 통계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어느 지역이 가장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다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가운데 청주지역 출토 젓가락 유물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 비해 철제 젓가락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20년 사이에 청주지역에 아파트 건설이 지속되면서 고려, 조선시대 무덤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유물중 숟가락은 1천여점, 젓가락은 150여점. 고려시대가 20% 정도이고, 나머지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것이다.

대부분의 젓가락유물은 특수계층이 썼거나 부장품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실제 생활에서 사용했다기 보다는 의례용으로 묻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이는 학계에서도 계속 연구중에 있다. 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는데도 숟가락과 젓가락이 이 정도 밖에 출토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분의 재질이 나무였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부장품중 숟가락의 비중에 비해 젓가락의 비중이 낮은 것도 이 때문이다. 썩고 닳아서 없어졌기 때문에 수량적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그림에서도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숟가락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젓가락은 명암동과 사직동 무심천변 사뇌사에서, 조선시대 젓가락은 성화동, 서촌동, 운동동, 미평동 등에서 출토됐다. / 송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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