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좋은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순수한 말로 마음을 나누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 사람은 주위를 환하게 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고 활력을 준다.

원어민 영어교사 로렌스가 그런 사람이다. 지난 3월 1일 학교에 부임한 후 로렌스와의 첫 대면은 참 인상적이었다. 우선 특이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정감이 갔다. 이제껏 원어민 교사를 겪어보았지만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안녕하세요?" 정도이다.

로렌스는 미국 원어민 영어교사이다. 미국에서 왔다고 해도 본토박이 백인 원어민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 출신도 있고, 동남아 출신도 있고, 심지어는 부모가 서로 다른 나라 출신인 사람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이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 해 전, 미국 뉴욕과 워싱턴 D.C를 가보았지만 참으로 다양한 인종이 사는 나라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인종이 섞이어 사는데 나라가 유지되고 그것도 세계 최대 강국을 자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워싱턴 D.C 교육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먼 이국 땅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교육정책에 대하여 설명하고 조그만 질문에도 성심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의 피부색을 가지고 인상을 찡그리거나 젠체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참 개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미국을 아름답게 하는구나 생각했다.

로렌스에게서 나는 그런 미국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로렌스는 원어민 영어 보조교사이다. 우리의 영어교육을 보다 잘 해보기 위해 우리가 채용한 사람이다. 수많은 여러 나라 중에 로렌스는 우리나라를 선택했고, 우연히 우리와 만나게 된 것이다. 만남이 과연 우연히 될 수 있을까?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만남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시간과 공간의 인연이 딱 맞아떨어져야 만남이 이루어진다. 로렌스가 수많은 시간적 흐름 속에 하필이면 이때에 한국에 왔고, 수많은 나라 중에 한국을 선택하고 그것도 충북 청주에 있는 우리 학교에 배정되었기에 만남이 가능했다. 시간과 공간 중에 어느 하나라도 이지러지면 인연은 빗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엄연하여 어김이 없다.

난 로렌스를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한국말을 잘 하고,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고 정감이 있을까 하며 상념에 젖기도 했다. 전생이 있다면 로렌스는 분명히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좋아할까. 외국에 가면 우선 낯설고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로렌스는 외국사람 같지가 않고 무엇보다 친근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공자는 "도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자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학생을 가르칠 때 자신이 아는 것을 의무로서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질문과 상황에서도 짜증 내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즐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하고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생각을 몽땅 내려놓고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로렌스의 방과후 수업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학생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참으로 많은 것을 준비했다. 시청각 자료며, PPT자료, 게임 도구 등 학생을 배려하는 것이 눈에 역역했다. 거기에다 한자를 칠판에 쓰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영어 원어민 교사가 한자까지! 알고 보니 중국에서도 공부를 했다고 했다. 한 명 한 명 영어를 읽고 쓰게 하면서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열정적이다. 이쯤 되면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암만 보아도 짜증을 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또 놀라는 것은 선생님들의 이름을 거의 다 안다는 것이다. 보통 보면 영어 선생님 정도 이름을 알고 있는데 로렌스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선생님과 소통하며 관심사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선생님들은 로렌스가 편하다고 한다. 누군가와 대화가 된다는 것은 편안함을 안겨 준다. 로렌스는 영어가 되는 사람은 영어로 또박또박, 영어가 되지 않는 사람은 한국말로 응수한다. 그러니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언젠가는 '좋은 데이'라는 소주를 가져왔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여행을 갔다가 사왔다고 했다. 또 언제는 소백산 막걸리를 사왔다. 깜짝 놀랐다. 조금 있으면 한국을 떠날 사람이 이런 걸 다 사온다? 잠깐 헛된 생각에 잠기고야 말았다. 알고 보니 이것은 로렌스의 정감어린 선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갔다 오면 그 지방의 특산물 등을 사와서 마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런 것을 보고 배웠노라고 했다. 로렌스가 소주와 막걸리를 살 때는 이미 한국 사람이나 다름없다.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 배어들지 않고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이제 떠난다.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기로 되어 있다. 한마디로 아쉽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듯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미얀마 여행을 마치고 대만을 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한국 여자와 결혼하라고 했지만 결혼은 미국 여자와 하겠단다. 아직은 청춘이 아까우니 많이 여행을 하겠단다. 어쩜 참 자유인이다.

여행은 영혼을 살찌운다. 자유를 만끽하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때로는 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다. 뭔가 하나는 배우기 때문이다. 아마도 로렌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청춘을 불사르고 싶은가보다. 마치 진리에 목말라하는 구도자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베토벤 같은 머리칼 모양이 영락없는 청춘 구도자다. 굿바이 로렌스!



약력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제5회 TV백일장 수필 당선

▶한국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청주지부 회원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청주 서현중학교 교감

▶choisise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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