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 선거기획사가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이었다. 지방의회 부활과 단체장 선거가 시작되면서 였다. 이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전문업체가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농촌 시·군이더라도 10여명 이상, 큰 지역은 수십명씩을 선출하는 지방의원 선거는 정치광고 시장을 한껏 키웠다. 업체들은 후보자 이미지 창출과 여론조사, 공보물 제작 등 당선에 이르기까지 '로드 매니저' 역할을 했다.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정치광고'는 무게감이 있었다. 후보자나 유권자 모두 '선거 매뉴얼'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정치광고 업체는 '아이디어 뱅크'로 간주돼 제법 대접을 받았다. 낙선자들이 지불을 약속한 돈을 떼 먹어 종종 낭패를 겪는 일만 없더라면 재미가 쏠쏠했던 시절이다.

2000년 이후 '미디어 선거' 양상으로 바뀌면서 '정치광고'는 '선거기획사'라는 형태로 체질을 바꿨다.

고유의 업무에다 운동원 동원, 방송차량, 플래카드, 홍보물 등 복잡다단해진 선거운동을 아예 대행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선거 매뉴얼'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디어 뱅크' 기능이 없는 이벤트 업체들도 대행할 수 있게 됐다. 선거를 집 짓는 일에 견준다면 건축업자에게 설계부터 준공까지 아예 일괄발주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거액의 선거비용을 지출하면서 불·탈법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깊숙한 부분까지 후보자와 공유하는 시스템이 됐다.

이런 판이 되다보니 선거기획사에 코가 꾀여 당선자가 낙마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19대 총선에 출마해 인천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소속 A의원은 대표적 사례이다. 회계책임자를 겸했던 기획사 대표에 약점을 잡힌 그는 법적 허용범위를 벗어난 컨설팅 비용을 추가로 줬다가 적발됐다.

결국 기획사 대표가 징역형(회계책임자)을 선고받아 벌금 300만원이 초과되면 당선무효되는 선거법에 따라 의원직을 잃었다.

이승훈 청주시장이 자신의 일을 도왔던 선거기획사 수사로 곤혹을 치르고 있다. 검찰이 기획사에 대한 압수수색과 측근 소환 등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이번 일 역시 선거기획사와 이 시장 사이에 거액의 돈이 오간 흐름이 검찰 수사로 확인되고 있다. 돈의 성격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 좀 더 봐야 할 일이다. 주목할 일은 6·4 지방선거 이후 이 시장 선거기획사와 측근인사들 주변에서 나오는 '잡음'이 유독 많았다는 점이다.

시중에는 측근들이 선거기획사를 '아지트'이자 '창구'로 삼아 이권개입을 한다는 류의 각종 소문까지 나돌았다. 사실이라면 당선자를 낸 선거기획사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일이다. 이 시장은 검찰 수사와 별개로 이참에 이 문제부터 털어야 할 것 같다. / 한인섭 정치부국장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