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지구상에는 수천 년 역사의 궤적을 밟아오면서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것들이 많다.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분열과 갈등으로 훼손되는 일도 있고,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나는 것들도 부지기수다.

역사 속에는 변화와 순환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만 법고창신이라고 했듯이 옛 것의 가치를 기반으로 새로움을 창조해야 함에도 과거의 그것을 쉽게 버리거나 훼손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에 주목하고 계승발전을 위한 다양한 전략과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는 문화유산은 세계적으로 1천여 건에 달한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 사업은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기록유산 등으로 구분해 추진되고 있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나누어 전개되는데 한국에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해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 역사지구, 하회와 양동마을, 조선왕릉, 고인돌유적, 백제역사지구 등이 있다.

안동은 유교책판이 기록유산에 등재된데 이어 서원과 사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등 그랜드슬램을 꿈꾸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는 김치문화, 아리랑, 농악, 줄타기, 한산모시짜기, 강강술레, 강릉단오재 등이 있으며 기록유산에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난중일기, 새마을운동 기록물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는 카트만두계곡, 모스크바 크렘린궁전, 영국 해양무역항 리버풀 등이 있으며 이탈리아는 베로나, 베네치아, 성 프란체스코 성당 등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에게 뼈아픈 역사의 현장인 일본 하시마섬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한중일이 문화유산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선정과 동시에 국제적인 지명도와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이 가능해지며 관광자원으로, 문화콘텐츠로, 지역 공동체의 자긍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며칠 전, 일본 최대 규모의 젓가락 회사인 효자에몽의 우라타니(浦谷兵剛) 대표가 청주를 방문했다. 청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젓가락페스티벌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그는 세계젓가락문화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사재를 털어서 젓가락교육과 문화를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청주에 와서 이승훈 청주시장과 이어령 동아시아문화도시 명예위원장을 만나 한중일 3국이 함께 손을 잡고 젓가락문화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고 제안했다. 젓가락이야말로 2천년이 넘는 역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중일 3국의 공통된 콘텐츠이며 짝의 문화, 정의 문화, 생명의 문화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동아시아가 갈등과 대립으로 아픔을 겪었지만 이제는 젓가락으로 하나되고, 젓가락으로 평화를 노래하며, 젓가락으로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 싶다고 했다.

청주에는 국립청주박물관을 비롯해 대학박물관 등에 수천 여 점의 수저유물이 있다. 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와 고구려 유물, 조선의 유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스토리텔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들도 확인되고 있다.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제숙공처 젓가락은 자식이 죽자 죽어서도 굶지 말고 공부하라며 젓가락과 먹을 함께 묻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먹은 최근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지정 예고되기도 했다. 고려가요 동동에 나오는 분디나무 젓가락은 지금의 산초나무인데 초정약수의 초(椒)가 산초나무다. 게다가 청주시가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되면서 젓가락페스티벌을 펼치게 되었으니 운명이 아니고 무엇일까.

역사가 사라지고 풍경과 신화가 사라진 땅에서는 사람의 삶도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 그곳은 사랑도, 공감도, 희망도 없는 죽음의 땅일 뿐이다. 젓가락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콘텐츠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가치있는 역할을 할 날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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