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재단 사무국장

고샅길 느티나무가 밤낮으로 갈색잎을 쏟아 놓더니 서설이 내린다. 꽃이 피고 새 순 돋고 만화방창 녹음으로 가득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나무들이 야위고 개울물이 야위어간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야위어가니 마음까지 정처 없다. 논두렁 마른 억새는 바람이 슬쩍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을 부비며 흐느낀다. 골목길 포장마차에서는 사람들이 소주 한 잔에 은유의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나붓나붓 떨어지는 눈발을 보니 마음까지 심란하다.

겨울의 도시는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붉게 빛나는 노을이 도시를 삼켜버릴 듯하다. 무심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동서로 낮고 느린 산들이 마천루를 포위하고 있다. 문명과 산과 들과 시냇물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는데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했던가, 고요 속에 생명의 흐름이 끼쳐오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곡진하다. 하여 천오백년 청주의 역사는 끈질기다. 그간 사람의 마음을 애태웠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사련과 아픔이 없는 역사가 어디 있을까만 그 견딤의 미학이 공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며 사랑을 만들어 온 것 같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기 때문일까. 다시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삶을 위해, 가장 순순하고 애틋한 사랑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미래와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일상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은 던지는 것이다. 창이 되기 위해서는 먼전 창을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블레스를 외치지만 진정한 노블레스는 낡고 비루한 생각을 버리고 창의적이며 세상과 소통 가능한 사고를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게 노블레스란 새로운 시선이다. 문화예술의 현장은 언제나 새로움을 요구한다. 훌륭한 문화기획자는 끝없이 일상의 파괴, 고정관념의 타출을 시도한다. 역사를 보는 시선, 문화를 보는 시선, 세상을 보는 시선,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마디와 마디를 읽는 시선이 항상 새로워야 하는 것이다. 진부한 것에 돌을 던지고 일상적인 것에서 새로움의 온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세상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한계나 제약 없이 누구나 새로움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의 확장,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인 것이다. 트렌드를 쫓지 말고 창조해야 한다.

젓가락페스티벌 기간 내내 새로움의 확장에 감사했다. 젓가락이라는 흔하디흔한 도구로 무슨 축제를 하겠냐며 냉소적인 사람들도 많았는데 막상 문을 열고 나니 나조차도 그 가능성의 무궁무진함에 놀랐다. 젓가락신동 경연대회에서부터 젓가락장단, 젓가락과 생명교육, 스토리텔링, 문화상품, 젓가락갤러리와 박물관, 젓가락마을, 음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확장과 가능성에 감사했다.

노블리스는 편견이 없어야 하고 순수해야 하며 배려의 문화가 담겨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랬지만 내게 영광이 깃들 때마다 고난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 영광과 기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만과 욕망과 편견을 갖게 되면 하늘은 내게 또 다른 시련을 주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마음이 고귀하고 정신이 순수해야만 진정한 창조성이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올 한 해 동아시아문화도시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그렇지만 하늘은 언제나 나를 한 곳에 머물게 하거나 자족하게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생각은 높되 생활은 낮게, 겸손을 실천하되 더 큰 꿈을 빚기 위해 멈추지 말 것을 주문했다. 달항아리의 담백한 기품과 정제된 예술미처럼 고난을 딛고 자신을 낮추며 그 누군가를 위해 맑은 미소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욕망과 편견과 이기주의를 멀리 해야만 진정한 노블레스의 길을 갈 수 있다. 소신은 분명하고 철학과 미학적 기반을 갖되 나만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아야 위대한 예술이 창조된다. 편견과 아집은 내 영혼까지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마다 나는 채찍을 든다. 머뭇거리거나 현실에 안주하려 할 때도 채찍을 든다.

그리하여 진정한 노블레스는 새로운 삶과 문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신을 낮추고 순수함으로 이웃을 보듬는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 작은 변화를 허락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창조의 가치를 일구는 것이다.

다시 새 날이 오고 있다. 더 큰 세상을 품기 위해 나의 길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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