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한 해의 끝자락에 서니 진한 삶의 향기가 끼쳐옵니다. 칼바람 앞에 서서 영혼까지 맑고 깊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는 기적처럼 견뎌온 삶의 궤적이 담겨 있기에 안쓰럽지만 황홀하기도 하며 신비의 설렘으로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올 한 해 내 삶의 꽃이 만개했습니다. 이 모든 고운 아픔을 딛고 자족할 줄 알며 기쁨과 영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삶이 심드렁해질 때, 욕심과 번뇌로 뒤척일 때는 더 큰 상처를 허락했습니다.

내 마음의 호수를 만들자, 천천히 서두르자, 새 살 돋는 아픔과 사랑을 위해 지금 서 있는 이 땅에 씨앗을 뿌리자,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이웃을 보듬자, 오달지고 마뜩한 기적을 일구자,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내 가슴에 하느님의 말씀이 꽃피는 새 날을 준비하자…. 이렇게 자신을 닦달하며 새 날을 준비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어령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신의 서재가 아니라, 연구실이 아니라 병실에서 만났습니다. 약간의 아픔이 있어 치료를 했던 것이고, 올 한 해 함께 펼쳐 온 동아시아문화도시의 수많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병문안도 할 겸 병실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었지만 매서운 눈과 힘찬 말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오래 전부터 힘들 때 더 강건했고,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음을 역설하셨습니다. 한 겨울에도 문고리 잠그고 마냥 봄을 기다리지 않았답니다. 아무리 추워도 봄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고, 매화향기를 맡으러 숲과 들로 나섰듯이 고단한 삶, 아픔이 많은 일상을 훌훌 털고 새 날을 향해 신발끈을 고쳐 매자고 하셨습니다.

숲속의 새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혼자 울지만 만리를 가는 말은 다투지 않고 함께 달린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작은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지, 큰 싸움은 승자와 패가가 없이 모두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함께 손잡고 새 날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젓가락페스티벌에서 보여주었듯이 가장 작은 도구가 가장 위대한 문화와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며 청주가 하면 세계가 할 것이고, 청주가 하지 못하면 세계가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책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가슴에 품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딸에게 보내는 시 중에 "오직 하나의 아침을 위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보거라. 너의 아침은 나의 아침, 그 많던 밤은 가고, 아침은 하나다…." 이렇게 아침마다 딸을 생각하며 울고, 맑은 햇살을 품고 일어나 창조의 길을 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순수하고 지고한 생명을 간직하며 살 것을 웅변했습니다. 그래서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 그래서 생명(生命)이라고 했습니다.

2015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니 평범한 일상의 풍경과 소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아픔과 좌절의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겼습니까. '생명의 대합창'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해 온 시간들 속에는 상처와 영광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견디고 나니 이렇게 성장해 있는 것을, 바람에 나부끼는 마른 낙엽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을, 그리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것을 몸과 마음을 체휼하는 세모(歲暮)입니다.

2016년 병신년(丙申年)이 문밖에서 기다립니다. 다짐을 합니다. 내 안에서 나를 보지 말고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지 말 것. 땅에서 땅을 보지 말고 오직 하늘의 마음과 시선으로, 하늘의 풍경과 영광으로, 하늘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 하늘이 보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의 마디와 마디를 만들어 갈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 넓게 보고 깊이 있는 삶을 일구어 갈 것, 그렇게 세상의 빛이 되고 새순 돋는 희망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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