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에 입사한지 4년 6개월 만에 지점장이 된 증권맨은 영업실적이 부진해 속이 탔다. 농사를 짓던 어머니는 마음 고생하던 아들이 안쓰러워 친척을 소개해 주었다. 그 친척은 2천만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시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발생했다. 친척은 '돈을 물어내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친척 간에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시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지점장은 농촌에서 누구 집 아들 때문에 돈을 잃었다고 소문이 나면 어머니가 불편하실 것 같아 억울했지만 원금을 돌려주었다.

최근 대우증권을 인수해 자본금 8조원의 대형증권사를 출범시키며 금융계의 '삼성전자'를 선언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2007년 펴낸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 나온 에피소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척돈은 어머니 돈이었다. 어머니가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은 늘 정직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까지 온 것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돈에 대한 올바른 관념 덕분이다"라고 썼다.

어머니에겐 '도전'이라는 DNA도 물려받았다. 위기는 기회를 만든다. 박현주가 그랬다. 한국경제가 가장 어둡고 혼돈스런 상황에 직면한 1997년 IMF사태때 그는 과감히 직장을 박차고나와 미래에셋캐피털을 세웠다. 증권회사도 무너지는 불안한 경제상황에서 승부사 기질을 보여주는 출발점이었다. 그때 삼성증권을 통해 판매한 상품이 국내 첫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였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펀드에서 그는 1년 만에 100% 수익률을 달성하며 후에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증권업계의 신흥강자로 펀드투자열풍을 이끌며 2007년 이후 업계 정상을 달렸다.

물론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7년 출시한 인사이트펀드는 출시 1개월만에 무려 4조원이 넘는 신규 자금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직격탄으로 누적 손실 규모가 50%에 달해 수많은 고객을 번민하게 만들었다. 이때 '이제 박현주도 한물갔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증권 인수로 박현주는 제 2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대형M&A에 흔히 등장하는 '승자의 저주'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금융시장은 대체로 우호적이다.

그는 "미래에셋을 아시아 1위의 금융투자회사로 키워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며 글로벌 투자은행(IB)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금융 전략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증권사에 입사하기 전 27살에 직접 '내외증권연구소'를 차려 미래의 꿈을 키웠다. 지금도 신입사원 최종면접을 직접 보는 그는 "젊은이는 꿈을 향해 도전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게 청춘의 특권"이라는 말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다. 길이 없어도 도전은 계속해야 한다" 는 말도 자주 쓴다. 그에게 도전의 끝은 무엇일까. 여의도 미래에셋 사옥옆면에는 "바르게 벌어서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라는 글귀가 써있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처럼 그도 최고의 기부가가 된다면 돈은 꽃이 될 것이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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