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세평] 이종수 작가·참도깨비 어린이도서관 관장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는 화두는 1회성, 낭비성, 소모성이었다. 문화융성 시대의 해석법은 단순명쾌했다. 1회성, 소모성, 낭비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 정파에 맞지 않는 단체 예산을 자르는 것이다. 시민들의 피 같은 세금이 불요불급한 곳에 쓰여지니 잘라내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시민들에게 전시회를 열고 공연을 하고 문학지를 내온 것이 하루아침에 자기만족을 위한 예술에 지나지 않다는 시한부 선언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의료과실이 틀림없는데 그것을 환자가 증명해야하는 현실처럼 1회성, 낭비성, 소모성 예술이 아님을 예술가와 작가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단체와 비교는 하지 않겠다. 누가 더 받고 덜 받고의 차이도 말하지 않겠다. 얼마를 받느냐는 차원도 말하지 않겠다. 어떻게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불치병에 해당하는 극악무도한 세 가지 잣대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들이댈 수 있는지만 묻겠다. 그 세 가지 잣대가 그동안 시민들을 위해 펼쳐왔던 예술 활동을 재단하는 수단으로 정당한지만 묻겠다. 꼼꼼히 모니터를 한 결과 이러저러한 부분이 세 가지 잣대에 해당하니 줄이거나 보완할 수 있겠느냐는 말도 없이 통째로 드러내는 일사분란함은 재개발공사 현장에서 보았던 완장 두른 어깨들의 무지막지한 힘만 느껴질 뿐이다. 회의 자료조차 파기한 상태에서 어디까지나 의원들의 신성하고도 소신 있는 결정이었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선거전에 명함을 돌리며 악수를 청할 때와 다수파를 차지하고 의회에 입성해서 정치적인 선택을 할 때의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표가 나올 곳과 나오지 않을 곳으로 구분해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양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일 뿐이다.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내도 되는 것인가. 문화융성이란 제 입맛에 맞는 편식에 정작 먹을 것은 하나도 없는 잔치판이 되어도 된단 말인가.

귀는 있으되 말할 입은 없다고 한다. 자르면 자르는 대로 알아서 각자도생하라고 한다. 예산이 없다고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예산 없어도 충분히 공연하고 전시하고 책을 낼 수는 있다. 그래야만 한다고 세 가지 화두를 붙잡고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삶의 현장 속에서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시민과 도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산, 당연히 지원해야 할 예산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엄정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음을 안다. 의원이기 앞서 시민으로, 도민의 한 사람으로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란 말이다. 문화 예술 현장에 있어보지 않고, 문화행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수파의 정략에 의해 반대파를 밀어내는 수단으로서 의회권력을 써서는 안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이 예술이 되고 우리가 사는 곳을 말해주는 예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만 하더라도 밥값, 표값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 받고 응원 받을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가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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