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총괄코디

오늘 아침에는 산행길에서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저녁에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지는 석양을 보았다. 회색도시에서 각다분한 삶에 찌들다보면 아침저녁으로 해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적이던가. 살아가는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돈과 명예와 시간에 쫓겨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위로와 새로운 다짐의 성소가 아닐까.

바다를 뚫고, 산봉우리를 타고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내 청춘이 다 가기 전에 못 다한 꿈을 일굴 것을 다짐한다. 그 다짐이 사그라들기 전에 마음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 팔순 어머니 품에 안겼는데 당신은 갑자기 "석양이 너무 곱구나. 내 삶은 이렇게 정처 없이 늙어만 가는데 태양은 언제나 새롭구나"라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당신께서는 자식들 교육을 위한 일이라면 궂은 일 마다하지 않았다. 누에 치고, 담배농사 짓고, 논두렁에 서리태 심고, 돼지 기르고, 나물 캐고, 심지어는 삯바느질까지 밤낮없이 일만 하셨다. 뒷밭의 사과를 한 광주리 따서 청주 육거리시장으로 가져갔는데 하나도 팔지 못하고 되돌아온 날이 있었다. 그날의 당신 말씀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들아, 사람들이 사과 알 작다고 사지 않더라. 애미는 못나서 이렇게 살지만 너는 큰 사람, 큰 사과가 되거라." 그날 나는 뒷곁 장독대에 숨어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큰 사람, 큰 사과가 되겠노라 다짐하고 눈물로 맹세 했던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뵐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로 나는 긴장케 한다. 그날은 작심한 듯 당신의 어릴 적 가정 이야기를 하셨다. 일제 강점기에 충남 온양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가계 몰락과 함께 위기가 닥쳐왔다. 그 때 어린 소년이 아픔을 견디며 자랄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임신 때부터 책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태어나서도 어머니는 항상 책을 소리내어 읽어주었고, 소년은 어머니 품에 안겨 낭창낭창한 책 읽는 소리에 젖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항상 책을 읽고 탐구와 사색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에 매진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틈만 나면 책을 읽어주며 괴테의 지성과 감성을 키우는데 힘쓰는 한편 언어, 수학, 예술, 과학 등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고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16살에 대학 입학하고 20대에 유럽을 뒤흔드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청빈한 선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백부에게 입양되었으며 아버지와 백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한문과 경서를 통달했다. 한문 공부가 깊어갈수록 우리의 글에 대한 가치와 원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의 나이 18세 때 인쇄소에서 잡일을 하며 배재학당에 입학해 학문의 기틀을 다지고 서재필과 함께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만들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연구단체인 국문동식회를 조직하는 등 한글 보급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의 대표적인 독서가인 이덕무와 김득신의 이야기도 가슴에 새길 일이다. 서민 출신의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라 부를 정도로 끝없는 책읽기에 정진했다. 이를 통해 신분상승 뿐만 아니라 북학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실학 사가(四家)로 불릴 정도였다. 조선 최고의 다독가 백곡 김득신은 독서를 통한 대기만성형 인간의 본보기다. 그는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라며 책읽기와 글쓰기에 매진할 것을 웅변했다.

모두들 북풍한설이 매섭다고 움츠린다. 그렇지만 봄의 전령 복수초와 매화는 한 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하지 않던가. 바람 부는 날 집을 짓고 궁핍할 때 책을 들어야 한다. 비바람 몰아칠 때 거리를 나서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강직한 길을 닦아야 한다. 나와 가정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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