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2007년 3월 한나라당 대권 레이스를 벌이던 이명박(MB) 후보가 청주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경쟁에서 밀려 탈당설이 나돌던 손학규 후보에 대해 질문을 받자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지만 밖으로 나가도 추운 곳으로 나가는 것이다"라며 탈당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손학규는 결국 '시베리아로 가겠다'며 당을 떠났다. 총선의 계절인 요즘 MB의 말을 새삼 뼈저리게 절감하는 후보가 많을 것이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진영'의원 처럼 하루아침에 야당의원으로 변신하는 의원도 있다. 비정한 정치의 속성은 국회의원의 정체성도 바꾼다.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사생결단으로 치닫고 있는 공천과정을 보면 저런 사람들이 그동안 어떻게 한솥밥을 먹으며 정치를 해왔나 궁금하다.

새누리당 공천위원들이 일부 후보들의 공천배제에 대해 기자들에게 "친박 학살의 주범이라 날렸다"고 한 발언은 섬뜩하게 들린다. 원수가 따로 없다. 친박이 설움을 받던 때가 2008년 총선 때다. 그 오랜시간동안 꼴 보기 싫은 인물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섞으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더민주당도 이참에 솎아내고 싶은 인물들을 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한 식구 의원들이 뒤에선 지난 8년간 공천 때만 기다리며 칼을 갈면서 벼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권력 앞에는 정치적인 이념도 보이지 않는다. 공천의 원칙과 기준은 자기합리화가 필요할 때 들이댄다. 심지어 공천자들의 당선가능성도 그들에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어차피 총선이 끝나면 바로 대선모드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충성도가 국회의원 후보의 가장 큰 덕목(德目)으로 여기는 듯하다.

인적쇄신은 총선에 즈음한 여야 정당의 기본전략이다. 새인물이 수혈돼야 정당은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총선이 끝나면 국민들은 4년 내내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총선 때라도 물갈이를 한다면 당의 이미지를 참신하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권력자의 속내는 또 다르다. 당권파가 비주류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총선이다. 그래야 대권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대표가 문재인 더민주당 전 대표와 격한 갈등 끝에 신당을 창당한 것은 결국 대권문제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총선이 불과 한 달도 안남은 상황에서 당이 마비될 만큼 친박계와 감정대립을 벌이고 있는 김무성 대표의 향후 선택도 주목된다.

공천학살은 결국 보복공천을 낳는다. 18 대 총선에서 '공천학살'의 주역인 친이계가 8년 만에 피해자로 전락했다. 총선을 앞둔 2008년 3월, 정권을 잡은 MB를 등에 업고 계파 좌장 이재오 의원과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이방호 전 의원 등이 친박계에 대한 공천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이하 박근혜)은 탈락한 친박 의원들과 만찬에서 "기준도 없는 표적 공천에 희생당한 여러분을 보니 내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당할 줄 정말 몰랐을까.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통해 "결국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권력이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가 등장한 것이 이때다. 박근혜는 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격려했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말은 이번 총선에도 나왔다. 인천시장을 역임했던 새누리당 안상수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 하면서 "안상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한것은 의도적인 패러디다. 이번 공천에서 컷오프 된 그는 "잠시 당을 떠나 국민의 성원을 받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예전 친박연대처럼 핍박받는 비박연대가 급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표로 정의(正義)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공천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무망(無望)하다. 이번 20대 총선 공천과정 역시 정의대신 힘의 논리만 존재한다. 개혁공천을 들먹이며 경선(상향식 공천)과 전략공천(하향식 공천)을 놓고 여야 당내에선 피튀기는 싸움을 했지만 주도권을 잡기위한 그럴듯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여야는 총선을 앞두고 공천혁신이라는 변죽만 요란하게 울렸지만 진정으로 지역주민이 원하는 후보가 공천된 곳이 몇 곳이나 될까. 더민주당 김종인의 비례대표 셀프공천과 새누리당 유승민 공천 대치는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블랙코미디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말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들이 써야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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