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우리는 욕심 많은 임금님이 왜 벌거벗었는지 다 안다. 아무나 입을 수 없는 특별한 옷이라는 재단사의 사탕발림과 신하들의 찬사에 속았기 때문이다. 권력 앞에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신하들 때문에 임금이 망신을 당하고 백성의 마음을 잃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안데르센의 걸작동화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寓話)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총선 전날 박근혜 대통령은 "저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마음과 몸이 무겁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총선 당일엔 선거기간 동안 주로 착용했던 붉은 재킷을 입고 투표를 했다.

붉은색은 새누리당의 상징색이다. 지지층에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불면(不眠)의 밤을 보냈다고 호소하고 붉은 재킷을 유니품처럼 입고 다녔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다 아는 그대로다. 대통령은 국민들을 향해 국회를 심판해달라고 했지만 정작 심판받은 것은 청와대다. 이제부터 대통령의 불면증은 더욱 심해질지 모른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장삼이사(張三李四)처럼 자식이 속 썩이거나 장사가 시원치 않고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라 나라 걱정 때문이라면 그 무게감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 것인가. 역시 여소야대였던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가 국민들의 공분(公憤)과 우려를 샀지만 결코 엄살이 아니었을 것이다. 국가현안은 산적해 있고 진도는 나가야 하는데 도무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답답하고 막막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총선 다음날 공식일정을 비우고 웬 종일 향후 정국을 고민했다고 한다. 언론과 정치권은 청와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총선결과에 대한 입장은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길 바란다. 국민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는 대변인이 밝힌 딱 52자 논평뿐이다. 제 3자가 마치 남 얘기 하는듯한 반응이다. 민감한 지역인 대구와 청주·전주를 누볐던 총선 전의 조급한 선거행보와는 전혀 다른 스탠스다.

임기 후반기에 갈수록 대통령의 이미지가 독선과 불통으로 굳어지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갇혀 민심과 유리된 채 독야청청(獨也靑靑) 근심을 껴안고 있는 임금에게 현명한 신하라면 무슨 말을 아뢸까. 이럴 때 청와대 참모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청와대 집현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대통령이 아무리 온갖 정보를 독점해도 민심을 속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는가. 대통령 특유의 '레이저 눈빛'에 기죽지 않고 꼭 해야 할 말은 당당히 하는 참모들이 없는 청와대는 고립된 섬이다. '배신의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유승민은 "저희가 돌아가서 대통령 주변을 둘러싸는 간신 같은 사람들을 물리치겠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입당을 앞두고 있는 유승민은 그 말을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 대통령이 유승민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 전에는 얼굴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난 주말 신문에는 한동안 입원했던 김무성 대표가 선거유세 복장 차림에 초췌한 얼굴로 나오는 모습이 실렸다. 눈은 흐릿하고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사진 한 장이 패닉에 빠진 새누리당을 설명해준다. 독선과 오기 정치의 끝판을 보여준 막장갈등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했지만 청와대도 새누리당도 몰랐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몰랐다면 국민을 우습게 봤거나 정말 무능한 것이다. 대통령의 진짜 걸림돌은 야당이 아니라 친박일지도 모른다.

이번 총선 결과는 청와대와 여당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민들에겐 퍽 다행스런 일이다. 여대야소가 됐으면 국민들은 얼마나 못 볼꼴을 보았겠는가. 진박 완장을 찬 홍위병들의 득세에 다음 대선은 보나마나다. 대선까지 내다보면 새누리당에겐 깊이 성찰하고 반성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국민들이 권력투쟁에 눈이 먼 여권에 정신 차리라고 내려 친 죽비다.

야당은 새누리당의 변신보다 민심을 변화를 세심하게 바라봐야 한다. 외신(外信)은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벌써 시작됐다고 타전했다. 실제로 총선을 전후해 대통령 지지도는 곤두박질 치고 있다. 남은 길은 멀지않다. 나라 걱정에 불면의 밤을 보낸다는 대통령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린다면 민생(民生)인들 편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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