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학창시절 작은 전기공사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면허를 가진 업체가 몇 곳이 안되다 보니 행정기관에서 입찰공고가 나오면 업체대표들이 모여 낙찰될 업체를 선정한 뒤 입찰 당일 몇 개 업체가 들러리를 섰다. 선정된 업체는 나머지 업체에 소위 '떡값'을 돌렸다.

이런 어둑한 시절엔 공무원의 갑 질도 흔했다. 명절뿐만 아니라 여름 피서철에도 업체에 아예 대놓고 휴가비를 요구하는 공무원도 많았다. 마치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는 것처럼 퇴근길에 들러 두툼한 봉투를 스스럼없이 받아가는 공무원도 보았다.

학생티를 벗지 못한 사회초년생의 눈에 비친 갑을관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사무실에선 권위적이었던 '사장님'도 말단 공무원 앞에선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갑의 위세는 대단했다. 어떤 때는 술값을 대납시킨 적도 있었다. 마음속으론 '낙찰 받은 공사를 하자 없이 열심히 시공하고 절차대로 공사비를 받는데 저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장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런 순진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년이 지났지만 공직자와 업자와의 갑을관계는 변한 것이 없다. 지난 4월 청주시 공무원 2명은 2박3일 일정으로 중국 광저우(廣州)로 여행을 가면서 (사)글로벌무역진흥협회 충북지부로부터 해외여행 경비1만4천900위안(280만원)을 상납 받았다.

이들 공무원들이 먼저 해당협회에 여행경비를 요구한 것으로 보도됐다. 돈줄을 쥐고 있는 공무원이 손을 벌리니 협회 측은 갖다 바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전형적인 갑 질이다. 오랫동안 공직자의 윤리의식은 답보상태이거나 외려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대기업의 갑질 행태도 만만치 않다 2년전 국회에서 열린 '재벌·대기업의 불공정·횡포 피해 사례 발표회'에서는 "자식뻘인 영업 담당에게 욕설과 협박, 갈취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명절 때마다 떡값과 지점 회식비 등 각종 명목의 돈을 요구받았다"라는 증언이 쏟아졌다. 대림기업과 몽고간장 경영인처럼 운전자를 학대하고 모욕을 준 고용주 갑 질 사례도 있다.

이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은 갑의 횡포로 고통 받는을(乙)들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을지로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임의 핵심멤버였던 노영민 의원은 투명한 정치를 추구하고 을들을 보호한다며 뒤에서는 피감기관인들에게 책을 강매했다가 결국 지난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갑질에 대한 공분이 쏟아지면서 정당과 기업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는 분석이 있지만 갑질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갑처럼 군림하려는 이른바 '갑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사회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이라고 모두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을이 자세를 낮추는데 비례해 더 큰 실리를 추구한다. 공무원에게 여행경비를 대줬던 협회는 2년간 청주시로부터 보조금 6억1천5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 업체는 아예 중소기업 수출관련 컨설팅 보조금을 독식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알바'할때가 떠오른다.

당시 전기공사업체 사장도 공무원 갑질을 묵묵히 감내하며 수의계약공사로 거액을 챙겼다. 먹이사슬의 어두운 이면엔 갑보다 더 센 을의 힘이 숨어있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