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총괄코디네이터

백중날이면 탕마당은 하얀 광목으로 나풀거렸다. 구녀산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드넓은 탕마당은 수백 개의 광목으로 가득했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이랑져 흐르는 실개천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까르르 웃음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악동들, 미루나무 아래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상큼한 바람결이 그럴 수 없이 좋았다.

도시의 사람들은 여러 날 전부터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방만 해도 수십 개에 달했고 놀음판의 야바위꾼도 한 자리 차지했다.

성냥팔이, 막걸리 집, 튀밥장수, 방물장수 할 것 없이 조용했던 시골마을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기생들도 치맛자락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호객행위를 시작했고, 어디서들 모였는지 건장한 청장년들로 가득했다.

초정리에는 음력 7월 15일 백중날을 전후하여 백중장(百中場)이라고 하는 꽤 규모 있는 장이 섰다. 천지음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이기도 하고 봄 여름 내내 고된 일에 시달린 머슴들에게 하루의 달달한 휴식을 허락한 날이다.

초정리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이날을 전후해 청주 일대에서 가장 큰 장이 섰는데 톡 쏘는 알싸한 맛의 초정약수가 있기 때문이고 약수탕 주변에 드넓은 공터가 있어 먹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술잔치를 벌이고 세시풍습을 즐겼다. 머슴들은 야바위꾼에 사기 당하거나 기생들 치마 속에 일 년 내내 벌은 돈 다 퍼붓기도 했다.

이 맛을 알기 때문에 도시에서 수많은 장사꾼들이 달려온 것이다. 사내들은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약수에 등목을 하고 여인들은 머리를 감고 그네놀이를 즐겼다. 인근의 내로라하는 풍물팀은 다 모였다.

흥겨운 우리가락 한마당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우승팀에게는 광목을 한 자루 시상했다. 약수 길어올리는 사람, 술독에 빠진 사람,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 엿장수 방물장수 튀밥장수 할 것 없이 사람풍경 가득했다.

초정리 백중놀이의 백미는 씨름대회였다. 1등에게는 황소 한 마리를 시상품으로 주어졌는데 건장한 청년 수백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매년 씨름대회 심판을 맡았다. 아니, 초정 백중놀이의 총감독 역할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비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했었고, 해방 후에는 고향에서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치며 동네 어른 역할을 했는데 사람들은 덕망 있고 균형 있는 당신께 이 모든 것을 맡기도 자문을 청했던 것이다.

샅바를 메고 모래판에 오르는 모습은 사람들을 흥분과 긴장으로 요동치게 했다.

힘이 장사요, 손재주가 민첩한 장정일수록 결승고지에 오를 확률이 높았는데 개중에는 안걸이·밖걸이·돌려치기 등 진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중을 사로잡는 사람도 있었다.

초정풍류는 1444년 세종대왕이 이곳에서 행궁을 짓고 두 차례에 걸쳐 121일간 머무르며 요양을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안질과 욕창 등으로 고생하던 세종은 세자와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이곳으로 달려왔다. 내정전, 근정전, 병영시설 외에 수라간과 욕간을 짓고 초정약수로 빚은 음식을 먹고 목욕을 했다. 이웃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고, 박연을 불러 편경이라는 악기를 만들도록 했다. 청주향교에 책을 9권 하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를 통해 조세법을 개정하고 인근의 청안지역에 시범 도입하기도 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곳에서 펼친 것이다.

살다보면 두뇌의 잣대로 세상의 이치를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싶고, 그 무위한 삶이 기진한 내 삶을 어루만져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마천루 빌딩에서 즐기는 행복보다 자연과 옛 추억을 통해 얻는 행복이 더 크고 아름답지 않던가.

풍류초정이 그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운 것은 농촌에 있다고 했다. 그날의 낡은 풍경이 무디어진 내 삶의 촉수를 깨우고 세상 사람들의 삶에 향기가 끼치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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