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표 감독의 데뷔작 「죽어도 좋아」를 보는 경험은 어찌됐든 곤혹스럽다. 개봉 전 벌어졌던 시끄러운 소동을 알건 모르건 어떻게 판단하건 상관없다. 많이 준비한 자, 적게 준비한 자 그 모두에게 이 영화는 일종의「테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전말은 이렇다. 토큰을 팔며 무료하게 삶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 그는 혼자 밥을 먹고, 빗질을 하고, 모로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던 그가 어떤 여성을 만나 한 눈에 반하고, 살림을 합친다.
 속전속결로 일을 해치우는 남녀가 정한수 떠놓고 맞절하며 부부의 연을 맺는 대목까지 영화는 평범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분명 편안히 주무시라고 인사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나와야 할 시간인데 안방 문이 여전히 열려있는 것이다. 뿐인가. 멀쩡히 안방에 자리잡은 카메라 앞에서 노인네들이 옷을 벗는다. 그리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살림 합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죽어도 좋을 만큼의 희열에 차서.
 이는 분명 「테러」라는 과장조차 허용될 만한 충격이다. 밤마다 틀니를 닦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직도 성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생각조차 못했던 이라면 경악에 찬 외마디가 터져나올 것이다. 노인의 성이 논란거리가 되는 사회 자체가 문제라고 평소 침착하게 일갈했던 이라도, 생생한 이미지를 맞닥뜨린데서 오는 시각적 충격마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매체가 늘상 소외시켜왔던 존재를 카메라 중심에 세운 「죽어도 좋아」의 「테러」는 그런 점에서 정당한 지지를 받을 만하다. 존재와 존재가 관계 맺으며 만들어내는 숱한 감정들, 기쁨과 설렘과 초조함과 희열 등등이 결코 특정한 물리적 연령대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었음을 박치규, 이순예 부부는 온 몸으로 증거한다. 빨간 욕조통에서 장난치는 무구한 기쁨과, 늦게 들어온 할머니를 타박하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집착, 복더위에 삼계탕을 고아 먹이며 아내 건강을 염려하는 따스한 보살핌은 보는 이들에게 뒤늦은 각성을 요구하며 후끈한 자책을 불러온다.
 이러한 「죽어도 좋아」의 정치적·윤리적 각성은 자신들의 사랑을 추호의 흔들림없이 신뢰한 노부부의 애정이 없었다면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과, 그 눈길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되갚는 할머니의 충만한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지 않을 진정성으로 스크린을 풍요롭게 한다. 이는 또한 노부부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그들의 진짜 삶을 살게끔 기다렸던 디지털 카메라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새삼 디지털 매체의 미학적 존재가치를 되새기게도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건 정말이지 아쉽다. 굳이 영화적 시선으로 이들의 삶을 접수하고 싶지 않았다던 감독의 의지는 영화를 67분짜리로 끝맺게 했다. 그런데 이 선택을 흔쾌히 지지하기에는 모양새가 영 어정쩡하다. 초반 기습공격처럼 펼쳐지는 7분간의 성교장면은 관객들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부수지만 그 충격을 얼추 수습한 관객들에게 영화는 시각적 충격과 윤리적 각성에 이은 무언가마저 전달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평가받을만 하지만, 여전히 못 다 채운 30분 만큼의 미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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