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사진 / 뉴시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 드리겠다. 459페이지 35번, 913 페이지 55번, 135 페이지 86번…."

북한 평양방송 여성아나운서가 지난 15일 정규 방송을 마친 0시 45분부터 12분간 방송했다는 내용이다. 북한이 남파 공작원 지령용 방송을 16년만에 재개했다는 내용으로 보도된 난수(亂數) 방송은 5 자리 숫자를 나열하는 방식의 암호였다. 방송에 동원된 '원격교육대학·수학 복습과제'류의 어휘는 남파 공작원을 뜻하는 '27호 탐사대원'과 함께 낯설면서도 이채로워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이 다시 공작원을 보냈다는 것인지, 과거에 보낸 자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대남 심리전 차원에서 안보당국에 교란 가하려는 단순한 의도라는 해석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5년 또는 10년 이상 장기 은둔해 왔던 공작원, 이른바 '슬리핑 이에전트(sleeping agent)'를 깨우려는 지령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북한이 사용한 난수방송과 같은 암호의 어원은 비밀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크립토스'이다. 평문을 해독 불가능한 것으로 변형하거나, 암호문을 해독가능한 상태로 변형하는 모든 원리를 말한다. 동서양·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나, 군사 지도자들은 비밀스런 통신을 방법을 썼다.

고대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저는 절친 부르투스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가 마지막 남겼다는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은 요즘도 통용된다. 시저는 가족들과 비밀통신을 주고 받을 정도로 살벌한 궁중생활을 했는 데, 죽기 직전 가족들이 보낸 암호는 '암살자를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시저는 가족들과 비밀 통신을 할 때 알파벳 순으로 세자씩 뒤로 물려 읽는 방법을 사용했다. 환자암호(문자를 다른 문자로 치환하는 암호)라고도 불리는 시저가 받은 마지막 암호를 세글자씩 당겨 읽으면 'Be Careful For Assassnator'라는 내용 이었다 한다. 가족과도 암호를 주고받았지만, 절친의 배신은 당할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암호'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영조시대 였다. 영조 25년 3월 25일 왕에게 전달된 '군호 단자'가 공란으로 비어 있었다. 과거시험이 열려 유생들이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호에만 열중했던 병조좌랑 최대윤의 실수였다. 영조 19년 7월 5일 영의정 김재로는 입직 당상관을 문책할 것을 건의했다. 군호에 '화(火)'를 쓰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여름에는 (火)가, 가을에는 (金)이 왕성하다는 점을 고려해 '금화'를 썼다 당상관이 곤혹을 치른 사건이 기록돼 있다. 경북 성주 사드배치와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발사 국면에서 불거진 '평양발 난수방송'이 시절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다. / 한인섭 부국장 겸 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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