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 재난영화의 진일보가 이뤄진 해다. 이 약진은 '부산행'이 끌고, '터널'이 밀었다.

좀비영화 '부산행'이 한국 재난영화의 '소재의 확장'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면, 10일 개봉하는 '터널'은 한국 재난영화의 모든 컴플렉스를 벗어던지며 '질적 확장'에 도달한 작품이다.

터널이 무너지고, 평범한 회사원 한 명이 그곳에 홀로 갇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그동안 숱한 재난영화들이 반복한 시민 영웅 서사, 이분법적 구도, 신파성, 무조건적인 스케일 키우기 등 이 장르의 클리셰 대부분을 비껴간다.

'터널' 김성훈(45) 감독은 이 상황을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해냄과 동시에 재난 안팎의 외로움과 두려움과 슬픔을 담아낸다. '끝까지 간다'(2014) 이후 연출가로서 한 발짝을 더 내딛는 데 성공했다.

김 감독을 만나서 이 영화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인터뷰에는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터널', 어떻게 시작하게 된 영화인가.

"원작 소설이 있다. '끝까지 간다'를 끝내고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원작의 결말이 매우 우울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나조차도 보기 힘든 이야기라는 생각에 안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만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바꾼다는 건 영화가 보여주듯 재난 상황을 블랙코미디적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하는 걸 의미하겠다.

"그렇다. 나를 구해준다는 확신이 있다면, 갇힌 사람이 '나 죽어'라고만 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매우 괴롭고 힘들고 외롭지만,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라면 그 버팀 속에서도 '캐스트 어웨이' 같은 낭만이 있고, 나름 삶의 재미를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한 거다. 그렇다면 이 영화, 재밌고 해볼 만하겠다고 느꼈다."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보다는 상황적 재미에 중점을 둔 시작이었다는 건가.

"내게는 '재미'라는 말이 말 그대로의 '재미'를 뜻하기도 하지만 '좋다'라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이 영화로 예를 들어준다면 어떤 건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 때문에 고통받는 인물을 통해 이 인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끝까지 간다'도 느닷없이 닥친 일을 수습하는 인물의 이야기인데, 이 인물에게는 음주운전이라는 원죄가 있지 않나. 그런데 '이정수'(하정우)는 아무런 죄가 없다. 자신이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을까 싶은 거다."

-시사회 후 기자회견에서 이 영화를 통해 '생명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정확한 말이겠지만 너무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게 키워드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메시지'라는 말에 좀 인색한 편이다. 감독이 그런 걸 말해버리면 영화를 그렇게만 보게되지 않겠나. 그런데 또 기자들은 그걸 묻는 게 일이고, 감독은 답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웃음) 예를 들면, 어떤 멋진 조각품이 있는데, 이 조각품의 뼈대가 다 드러나면 그게 얼마나 촌스럽겠나."

-이 작품을 단순 오락영화로만 볼 수 없는 지점이 있지 않나.

"그런 부분이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그런 건지,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사람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 사람이 갇혀서 죽어가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다. 사람에 대한 예의, 사람의 생명 그 자체가 희망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역시 세월호 참사 때문일 거다. 이 영화가 그 사건을 무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나. 우리 국민은 여전히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음…시사회 전 제작보고회 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세월호에 대한 풍자가 의도된 것인가요?'라고. 그때 난 '의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건 맞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향은 받았을 거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 중에 이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그 사건의 자장 안에 있고, 그 슬픔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건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건 의도와는 다른 문제라는 거다."

-제작보고회 때도 그렇고, 시사회 후 기자회견 때고 그렇고 세월호에 대한 질문을 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심스러웠던 건, 이 사건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거다. 만약 세월이 흘러서 이 사건의 결론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다음에 어떤 영화가 나온다면 모를까,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고를 당한 분들, 유족들,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함께 겪고 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거다."

-재난영화로는 특이하게 사고를 당한 사람이 단 한 명이다. 왜 한 명이었나.

"재난은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것이다. 당연히 살면서 한 번도 겪고 싶지 않고, 뉴스에서도 보고 싶지 않다. 여기에 혼자 있다는 게 추가되면 그 공포가 배가 되지 않겠나. 밤길을 혼자 걷기만 해도 무서운데, 그 어마어마한 재난을 혼자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해봐라. 그랬을 때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 외로움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한 명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오히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만약에 터널 안에 수백명의 사람이 갇혀 있다면 이 사람들을 구하느냐 마느냐 같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위험에 빠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때부터는 이 사람을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거다. 사람의 생명을 놓고 다른 것과 경중을 따지게 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가 단 한 명일 때, 우리 사회의 민낯이 철저히 드러난다고 봤다."

-그런데 피해자 한 명을 유지하지 않고, 또 다른 피해자 한 명과 강아지 한 마리를 등장시킨다.

"두 시간을 끌고 가야하니까 필요한 부분이었다. 또 '이정수'가 두 시간 내내 좁디 좁은 공간에만 갇혀 있는 건 나도 보기 힘들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으면 공간이 조금이나마 확장될 거라고 봤다."

-또 다른 이유는 없었나. 가령, 피해자가 두 명이 되면서 물을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 않나.

"그런 부분 역시 있다. 그 대목은 관객의 동참을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정수는 계획에 따라 자신이 마실 물의 양을 나눠놨는데, 갑자기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서 물을 나눠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때 관객들은 이 행동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을 봤을 때, 관객의 마음은 달라질 수 있다. 내가 가졌던 생각에 안도할 수도, 그 생각이 미안할 수도 있다. 일종의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상업영화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 선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예고편만 봤을 때는 이 영화가에 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노골적으로 담겨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는 그런 게 없더라. 심지어 이 영화의 인물 대부분은 매우 합리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한다. 물론 무능한 정부와 천박한 언론, 더딘 구조작업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런 것들을 툭툭 던지듯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태도가 이 영화의 풍자 기능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극단적인 악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흔히 재난영화들은 고위 관료나 대기업 임원들을 생명을 경시하는 부류로 표현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쳐가는 사람들, 이 상황이 만들어내는 딜레마 같은 것들이다. 이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에게 구조 중단 동의서를 받으러 온 관료(박혁권) 또한 얼굴에 미안함이 묻어있지 않나."

-이와 함께 '터널'은 다른 재난영화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감정이 매우 절제돼 있기도 하다. 하정우·오달수·배두나 또한 관객의 감정을 대놓고 흔드는 스타일의 배우들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하정우의 장점은 매우 절제된 연기를 한다는 거다. 그는 미니멀하고, 세밀한 연기를 한다. 오달수나 배두나도 마찬가지다. 무표정으로 있을 때 더 슬퍼 보이는 배우들이다. 관객이 이정수의 상황에 공감해서 눈물 흘릴 수 있겠지만 눈물을 뽑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세 배우를 캐스팅 한 것도 부분적으로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외롭고, 슬프니까, 배우들이 울지 않더라도 그 슬픔이 뚫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먼저 울 필요는 없다. 눈물은 관객에게 넘기고 싶었다. 물론 이정수는 카메라가 보지 않았을 때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의 눈물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건 세현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대부분 요소에 동의하지만 조금 걸리는 두 장면이 있다. 구조작업을 펼치던 '조 반장'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장면과 이정수가 구조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상대적으로 너무 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음…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하지만 최소한 저한테는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거다. 만약에 나라면 언제 구조 중단에 동의할 것인가. 내 와이프가 터널 안에 갇혀있다면 난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몇 백조가 들어간다고 해도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면, 철저히 약자인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면 그때는 동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거다. 죽은 '조 반장'의 노모 또한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그래서 다소 극적이더라도 이 장면을 넣어야 했다."

-이정수가 극적으로 구조되는 장면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

"일단 그가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되면,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해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과정은 생략해도 된다고 봤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결말이다.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린다. 다시 터널로 들어가는 장면도 그렇고, 차 안에 딸과 함께 생존에 성공한 강아지도 없다. 불완전해 보였다.

"일단 새드엔딩으로 만들면 내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공감하는 이야기도 좋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괜찮은데, 괴로운 이야기는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론이 '우리 모두 행복해졌어요'라는 건 아니다. 그런 결말은 나도 불편하다. 이정수가 구조됐다고 해서 이 사회의 시스템이 단번에 개선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다시 한 번 정수와 세현이 터널을 통과하게 하고, 고가 도로를 달리게 해서 여전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딸과 강아지가 차 안에 없는 것도 그런 거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다."

-겨울이 배경이다. 왜 겨울이었나. 요즘 같은 날씨라면 여름을 배경으로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겨울은 죽음과도 관련이 있지 않나. 물론 새로운 탄생을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지만 말이다. 세상의 색도 잿빛으로 변해간다. 지쳐가고 쪼그라드는 느낌을 계절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나중에는 눈까지 내린다.

"눈이 내려서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을 원했다. 그리고 정수는 점점 묻혀가고 잊혀져 간다. 눈의 무게 조차도 정수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밖은 하얗게 변하는데 정수가 갇힌 곳은 점점 어두워지는 대비도 보여주고 싶었다."

-시사회 후 반응이 매우 좋았다.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가.

"그 반응을 의심하면서 기다리고 있다.(웃음) 생각보다 좋은 말들을 많이 해줘서 위로가 된다. 스태프들과 기술 시사회를 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준 적 있다. 그때 정말 고마웠다. 언론 시사회 끝나고 나온 좋은 반응들 또한 고맙다. 이제 정말 돈을 내고 보는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다. 1만원, 정말 엄청난 돈이다.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 돈과 시간을 쓰는 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떨리고 궁금하다."

/뉴시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