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개봉하는 '터널'(감독 김성훈)은 10여년간 이어진 한국 재난영화의 컴플렉스를 벗어던지며 '질적 확장'에 도달했다.

재난영화의 클리셰인 덩치만 키워가는 재난이 없고, 시민영웅이 없으며, 이분법적인 인물 구도가 없다. 과잉된 감정이 없다는게 매력이다.

특히 장르의 관성을 비껴간다. 대신 통제불가능한 일에 마주한 공포와 맞선다. 두려움과 외로움, 슬픔 등의 감정들을 러닝타임 내내 유지하면서 재난 안팎의 상황들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 현 사회의 병폐를 묘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도 곱씹어 볼 만한 정제된 희망을 보여주는 품위까지 있다. 물론, 여름철 대규모 관객을 노리는 상업영화로서의 역할도 다한다.

자동차 영업사원 '이정수'(하정우)는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다가, 그 터널이 붕괴되면서 차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다행히 그에게는 주유소에서 받은 500㎖ 생수 두 통과 딸에게 줄 생일 케익, 78% 정도 배터리가 남아있는 스마트폰이 있다. 119 구조대는 그에게 일주일만 버티면 구조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잠시 좌절했던 이정수는 평점심을 되찾고 생존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무너진 '터널'은 묘하다. 이정수의 다급한 구조 요청에 사무적인 말투로 인적 사항과 현재 위치 등을 일일이 캐묻고,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주세요"라는 구조대원의 말에서 세월호 참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더디기만 한 구조작업의 모습이 보여질 때마다(그것이 아무리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더라도) 정부의 무능함과 호들갑스런 언론이 더 부각되면서 그 날의 그 상황을 더 각인 시킨다.

'터널'의 연출이 뛰어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영화의 풍자와 해학은 구속(球速)이 아닌 제구(制球)로 승부를 본다.

김성훈 감독은 자극적인 묘사나 편집으로 관객의 즉각적인 분노나 울분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진솔한 대사와 정확한 포착, 장면의 비틀기를 통해 흘려들을 수 있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지점에서 관객의 마음을 흔들고 씁쓸한 웃음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

가령 "사람이 갇혔어요. 여기 사람이 갇혔다고요" "그 사람 살아있으면 어떡해요. 미안하지 않으세요?" 등의 대사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 그 자체로 관객의 가슴을 친다.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이 쓰러지자 언론의 카메라 플래쉬가 쏟아지는 아주 짧은 장면을 통해 자극적인 보도만을 쫓는 언론의 가벼움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사고 현장 기념사진 사건'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관료들이 서로 사진에 나오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집어넣어 완곡하지만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눙치는 듯한 풍자와 해학은 절제된 감정과 만나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터널'은 세현이 소리내어 우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을 만큼(정수는 딱 한 번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또한 '오열'과는 거리가 멀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진행되는데, 이 때문에 후반부 세현의 결단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재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인 질문들까지 관객을 향해 던져놓는다는 점이다. 구조일을 계산해 나눠놓은 물을 다른 피해자와 나눠먹어야 할 때 생기는 마음 속 갈등,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정수를 진심으로 도와주던 사람들이 도리어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 2·3차 피해는 계속해서 발생하는데 언제까지 구조 작업을 펼쳐야 하는지 등의 질문들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나'라고 툭 던져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단 한 명의 피해자라는 설정은 단순히 극의 재미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이런 물음들에서 알 수 있다.

'터널'의 또 다른 장점은 이 부분들을 장르영화 틀 안에 넣어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큰 상업영화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김성훈 감독은 터널 바깥의 상황 변화와 터널 안 정수의 심리상태를 어느 시점에서는 일치시키고, 또 어느 시점에서는 엇갈리게 해 영화의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은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함께 자칫 심각해져 가라앉을 수 있는 작품에 활력과 탄력을 부여한다.

활력과 탄력은 배우들의 연기로 빛을 발한다. 하정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생생한 연기를 선보인다. 웃어야 할 때와 찡그려야 할 때, 소리를 질러야 할 때와 궁시렁 거려야 할 때를 감각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한다.

오달수와 배두나도 마찬가지다. 두 배우가 맡은 역할은 사실 매우 평면적인 역할이다. 오달수의 '대경'은 정직하고 올바른 직업윤리를 가진 구조대장이고, '세현'은 어찌보면 정수의 구조만을 바라는 평범한 아내일 뿐이다. 그러나 두 배우는 이 배역들에 생기와 온기를 함께 불어넣어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캐릭터로 살려낸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고립된 한 남자를 통해 '생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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