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성생활, 그들의 사랑

그녀의 성생활은 특이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원 교수. 음표 하나의 어긋남도 용납않을 만큼 엄격했으며 언제나 5도 정도 쳐든 완강한 턱선을 가진, 얼음과 같은 이성의 슈베르트 전문가. 창백한 연습실에서 샌드위치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며 레슨을 마친 그녀는 포르노숍을 찾거나 드라이브 인 시어터에서 독신의 성생활을 즐긴다. 그녀에게 절정의 쾌감을 선사하는 건 포르노숍에서 모르는 남자가 버리고 간 휴지뭉치와 한창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카섹스 현장.
 타인을 배제한 채 자급자족하는 그녀의 방식은 분명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문제일까. 마흔도 넘은 딸을 침대 옆에 재우면서 귀가시간과 쇼핑 목록까지 간섭하는 유별난 어머니와의 애증이 그녀의 욕망을 비틀어 놓긴 했으리라. 그로 인해 제 때 짝을 찾고 제 때 생산하는 사이클을 타지 못한 그녀의 삶은 얼음장 같은 얼굴, 마른 가랑잎 같은 몸 안쪽에 아우성치는 욕망의 물줄기들을 위한 별도의 배출체계를 마련하게 됐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유려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고 흐르다가 어떨 때 낭자한 선혈로 비어져나오거나 굵은 소변줄기로 쏟아진다. 마치 비명처럼.
 그러니 이러한 작동기제 자체를 「비정상」이고 「변태」라고 비난하는 건 실상 소용없다. 그녀가 날카로운 면도날로 베는 것은 오직 그녀의 외음부일 뿐. 그녀의 특이한 성생활은 누구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에너지와 예술가적 천재를 한 몸에 갖춘 클레메가 그녀를 「에리카」라고 부르던 순간부터 냉담과 열정의 위태로운 자족적 공존은 위협받는다. 「함께 하는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몸이 단 젊은 남자는 나이 든 여자가 제안하는 「사랑 게임」의 규칙을 결국 체득하지 못한다. 사도 마조히즘적 섹스라는 방식을 통해 지켜보기만 하던 사랑에서 직접 하는 사랑의 첫 발걸음을 떼려던 에리카는 인내심을 호소하지만, 젊디 젊은 그는 자신의 사랑에 생채기 낸 그녀를 폭력적으로 응징하고 만다.
 「퍼니게임」으로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그런 점에서 단호하게 잔인하다. 에리카의 특이한 성생활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거부하는 그는 정상/비정상의 경계짓기에 대해서도 코멘트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논리와 해석체계를 지닌 사랑의 방식이 덜 이해받거나 혹은 오해되었을 때, 그 때 「사랑해」라는 한 마디가 얼마나 처참하게 허공에 산산이 부서져버리는가를 냉철한 눈매로 지켜보게 할 뿐이다. 결국 역겨운 것은 다수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에리카의 특이한 사랑방식이 아니다.「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사랑인가를 묻는 영화의 질문 앞에 「구원으로서의 사랑」은 점점 위력을 잃고, 그럴수록 두려움을 동반한 불쾌감은 커져간다.
 관객 스스로 해석하기를 바란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 「피아니스트」는 마치 거대한 미궁과 같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불쾌감, 그러나 역겨움 속에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슬픔의 정조는 침묵 속에 펼쳐지는 회심의 일격으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그 장악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연기를 펼친 그녀, 이자벨 위페르에게서 나온다. 2002년을 빛낸 최고의 절창(絶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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