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는 꼬여버린 로맨스에 관한 산뜻한 이야기다. 말과 관계와 공간에 관한 재기발랄한 탐구로 볼 수도 있다. 하루 동안 벌어진 귀여운 1인 로드무비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떻게 즐겨도 상관없다.

다만 이 모든 걸 끌어안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최악의 하루'는 '위로의 영화'다. 이 위로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가 아닌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지'의 위로다. 쓸쓸해도 나쁘지 않다. '최악의 하루'는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삶을 향한 재기발랄하면서도 쓸쓸한 찬가다. 주인공을 따라 서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남산의 정취에 취해 킥킥대면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 오면 당신도 그들과 함께 생각에 잠길 것이다. 영화는 괜찮다고, 괜한 자기비하는 그쯤에서 그만둬도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지나간 일은 모두 좋은 추억이 될 거라며 어설픈 조언과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최악의 하루'는 나도 오늘 힘든 하루를 보냈고, 오늘 정말 안 풀리는 날이었다고, 서로에게 털어놓는다. 그래서 그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유치하지 않게 들린다.

김종관 감독을 만나 '최악의 하루'에 대해 들어봤다.

-반응이 좋다. 기분이 어떤가.

"좋다. '최악의 하루'도 작은 영화이지만, 그동안 이보다 더 작은 영화를 해왔다. 그래서 반응이 즉각 즉각 오는 게 아니었다. '료헤이'(이와세 료)처럼 떠돌면서, 작은 성취에 만족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랬던 것과 비교하면 전과 다르게 행복하다."

-바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최악의 하루'는 분명 독특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하나의 키(key)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시작은 '은희'(한예리)가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성격을 달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물론 이건 누구나 가진 성격이다. 나도 그렇고 모두가 이중, 삼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성격들이 충돌할 때, 성격의 포지션이 충돌할 때 어떤 재미가 일어날지 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는 캐릭터의 성격 말고도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있지 않나.

"그렇다. 성격에다가 어떤 공간에 관한 이야기, 창작에 관한 이야기도 넣고 싶었다. 이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여자다. 여자의 직업인 배우도 어떻게 보면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다. 여자가 만나는 소설가 또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또 한 여자의 방황이 중심인데, 그게 확대되면서 벌어지는 재밌는 이야기를 원했다. 이 작품을 보는 방식은 각기 다를 것이다.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나는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내 창작물이 많은 관객, 많은 독자에게 보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창작의 고단함이 있다. 그런 것들을 조금 유러머스하게 풀어내는 건 어떨까 생각하다가 이 작품을 하게 됐다. 내 일상은 걷고 어딘가 들어가서 차 마시고 또 걷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들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내 생활 패턴의 총체화된 공간이 영화에 다 들어가 있다."

-서촌이 바로 그런 공간인가(영화는 서촌에서 시작해 남산으로 옮겨간다).

"그렇다. 여기 산 지 5년 정도 됐다."

-남산에도 자주 가나보다.

"그렇지는 않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서 산책하는 정도다. 남산 길이 퇴로가 없지 않나. 영화는 은희가 남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용이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촌과 남산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이 영화에서 장소 혹은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그만큼 큰 것 같다.

"서울의 공간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영화다. 서울의 번잡한 모습, 혹은 랜드마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골목길, 산책로 등 바쁜 일상과는 다른 공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공간들은 사람들이 쉬거나 머무르는 공간이니까 일상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현실적인 공간이지만, 비현실적이다. 일상의 틈을 벌렸을 때 거기서 새롭게 생긴 어떤 '무드'가 만들어지길 바랐다."

-결국 '최악의 하루'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하루에 관한 영화일 텐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보면서 몇몇 감독들이 떠올랐다. 홍상수, 리처드 링클레이터, 우디 앨런, 장건재('한여름의 판타지아') 등이다.

"내가 장르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들도 그런 영화다. 원데이 트립 같은. '비포 선라이즈' '로마의 휴일' '텐텐' '휴일'(감독 이만희) 같은…."

-'최악의 하루'는 물론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런데도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감독들에게 영감을 받았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내 취향의 영화들이 내 영화 안으로 들어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악의 하루'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기모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나. 인간이 가진 속성에 관한 그런 영화다. 이를테면, 이런 건 홍상수 감독도 깊이 있게 하고 있다. 또 그의 영화를 좋아하기도 한다. 내가 읽고 보고 느끼는 것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줄 것이다."

-홍상수 감독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해보자면, 홍 감독의 과거 작품을 보면 인간에 대한 냉소가 있지 않나. 하지만 당신은 인간적으로 별로인 사람들을 매우 귀엽게 바라보는 듯했다.

"사람마다 결핍이 있다. 나 역시 사람을 차갑게 보는 시각이 있어서 '최악의 하루'가 착한 사람이 없는 극이 됐을 것이다. 관객이 이 인물들을 통해 기분 나쁘지 않게 자기 반영을 하기를 바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난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이 작품이 평범한 사람이 겪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라는 걸로 들린다. 그리고 당신은 이 사람들과 일상을 긍정하는 것 같다.

"최악의 하루이지만, 누구에게 있을 수 있는 위기 아닌가. 인생의 치명타까지는 아니다. 은희한테도 또 다른 인물에게도 그렇다. 은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거짓말을 더 잘하게 될 수도 있다. 은희에게도 교훈이 있긴 하겠지만, 영화가 꼭 주인공을 성장시켜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하루가 아주 무거운 하루는 아니었을 거라는 낙관이 있다. 쓸쓸하면서도 낙관적인 그런 태도다."

-낙관을 말했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이 해피엔딩이라는 게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의 해피엔딩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무슨 의미인가.

"음…, 료헤이가 말하는 '해피엔딩'이라는 단어로 은희가 '해피'를 얻는 건 아닐 것이다. 은희의 하루는 분명히 무너졌다. 그런데도 은희는 그 이후에 료헤이를 만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강함이 있다. 그는 스스로 외롭고 어두운 길을 간다. 그리고 혼자 간다. 다만 은희는 잘 가고 있고, 열심히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일 것이다."

-영어 제목은 '워스트 우먼'(Worst Woman)이다. 원래 제목도 '최악의 여자'였던 걸로 안다. 왜 제목을 바꿨나. 또 '최악의 여자'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은희는 두 남자에게 최악의 여자일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미와 함께 이건 최악의 상황에 놓인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최악의 여자'라고 제목을 지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엣지'있는 제목이랄까. 하지만 마케팅팀에서 이 제목이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하더라. 여자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물론 처음에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바뀐 제목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네 명의 배우 모두 정말 좋은 연기를 하더라. 물론 결과론적이기는 하나 정말 최상의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 적역의 캐스팅을 하고 싶었다. 네 배우 모두 너무나 원했던 배우들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알게 된 건 내가 시나리오상으로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욕심을 정말 많이 냈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배우들도 전에 해보지 않았던 걸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영화에 시간을 내준 것 같다."

-물론 모든 배우의 연기가 좋았지만, 특히 이희준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더라. 뭐 이런 캐릭터가 다 있나 싶었다.

"(웃음) 극화된 코미디가 아닌 일상적인 코미디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편적인 감성으로 즐기는, 귀여운 코미디랄까. 그런 면에서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운철'이 중요했다. 이희준 배우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시나리오를 보더니 운철이 자기 몫이라는 걸 단번에 알더라. 감각적인 연기였고, 정말 잘해줬다."

/뉴시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