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필자가 중학생시절 부모님 생신날 모처럼 쌀밥을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을 챙겨왔다가 오전 수업시간 내내 불안했던 기억이 있다. 교장선생님이 불시에 도시락 검사를 했기 때문이다. 1교시 끝나면 학교재단 설립자의 사위인 교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휘초리를 흔들며 책상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게 했다.

흰 쌀밥을 싸온 학생들에겐 불호령이 떨어졌다. 잇따라 걸린 학생은 휘초리로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당시엔 도시락에 30% 이상의 혼식이 돼있지 않으면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했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공짜 점심을 먹는 요즘 중학생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1970년대만 해도 절미운동(節米運動)의 일환으로 혼식과 분식을 강제하는 식생활개선정책이 시행됐다. 1960년대 대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먹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1963년엔 점심시간에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하고, 7월 11일을 첫 '무주일(無酒日)'로 정해 술 판매마저 금지했다. 1969년부터는 분식장려운동도 시작됐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일명 무미일(無米日)로 지정하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엔 쌀로 만든 음식 판매를 못하게 했다. 쌀이 태부족하자 대량으로 미국에서 밀가루를 수입하면서 정책적으로 밀 소비 촉진정책을 펼친 것이다. 5·16 혁명정부에겐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소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그나마 70년대엔 먹고살만한 시대였다.

1952년 6·25전쟁이 끝나고 10여년 간 시골에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 부황증(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을 만큼 곤궁한 시기였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나라가 불과 반세기 만에 남아도는 쌀 때문에 고민하는 나라로 변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풍(大豊)이다. 별다른 자연재해가 없고 9월 일조량이 좋아 쌀 생산량은 연간 430만t을 웃돈다. 농민들 입가엔 웃음꽃이 펴야 하지만 외려 울상이다. 쌀 생산량이 늘면서 쌀 재고량도 200만여t(정부 175만t, 농협RPC 33만8천t)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반면 쌀 소비량 역시 매년 감소세다. 국내 1인당 쌀 소비량은 매년 2㎏씩 줄어 지난해는 63㎏까지 내려앉았다.

곳간에 쌀은 넘쳐나지만 국제무역기구(WTO) 내국민대우 원칙 위반 때문에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의 80∼90%를 차지하는 밥쌀용 쌀까지 수입해야 한다. 대풍에 쌀을 수입하고 있으니 수매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요즘 쌀값은 1990년대 초반수준이라고 한다. 곡창(穀倉)지역 농민들이 황금들녘에 트랙터를 타고 들어가 '논 갈아엎기'에 나서는 이유다.

쌀 과잉생산, 쌀 재고량 증가, 쌀 보관비 낭비등 정부의 쌀 산업 정책은 모순투성이다. 먹거리가 다양하고 풍요해진 시대에 쌀소비가 가파르게 감소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쌀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술하지 않는다면 해를 거듭할수록 '대풍'은 축복이 아니라 악몽이 될 것이다.

박상준 /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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