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전섭 수필가

차마 손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늙은 등걸 위 매화가 활짝 핀 도자기에 놓인 홍시 세 알은 한 폭의 수묵화이다. 거실 탁자에 놓인 홍시는 간식거리가 아니다.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안긴다. 홍시의 말간 속살과 단내는 유년시절 무시로 파고들던 당신의 품속이자 병약한 자식을 안타까워하던 속마음이다. 창밖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홍시의 얽힌 추억들은 더욱 명료해지니 어찌 홍시에 손을 댈 수가 있으랴.

내 기억은 쏜살같이 고향 마을로 달려간다. 지금쯤 시골집 담장 뒤편에 자리한 고목이 된 감나무에도 붉은 홍시가 매달려 있으리라. 까치가 반쯤 파먹다가 만 선홍색 홍시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사랑의 징표다. 무더운 여름날 지나던 길손에게 꽁보리밥 한술과 시원한 물 한 바가지 건네던 훈훈한 정이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 한낱 미물에게도 도타운 마음을 베풀던 어머님의 웅숭깊은 사랑이다. '홍시를 보면 울엄니 생각이 난다'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붉은 홍시를 보면 괜스레 그리움의 눈물이 배어난다.

홍시를 좋아하시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입에 댈 수가 없다. 어릴 적 고뿔로 몹시 아팠을 때 입맛 돋우라고 홍시를 체에 걸러 한 숟갈씩 입에 넣어주던 당신의 모습이 그리워 눈물이 핑그르 돈다. 병에 걸리면 약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냥 몸으로 견디며 이겨내던 시절이 아닌가. 내가 감기로 기침이 끊이질 않고 시퍼런 콧물을 줄줄 흘리며 몸져누워 있을 때다. 미음조차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십 리쯤 퀭하니 들어간 눈만 껌뻑거리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신다.

"아가, 이거라도 먹어야 산다. 어여 받아먹고 기운 차려야지."

어머님 손에는 하얀 사발이 들려 있다. 굵은 체로 걸러낸 홍시물이다. 단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홍시는 입맛을 돋우는 영양제나 마찬가지다. 홍시를 입에 넣자 온몸에 생기가 도는 듯하다. 나는 며칠 후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밥숟갈도 입에 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한적하고 마당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단다. 그 성화에 못 이겨 아파트를 처분하고 한적한 시골에 옮겨 온 지도 여러 해다. 처음에 심드렁했지만, 전원생활을 즐기다 보니 갈수록 새록새록 사는 재미가 늘어난다. 전원생활이란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만큼 몸은 고달프다. 하지만 그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말이나 글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계절마다 수십 가지의 꽃들이 피고지고, 꽃과 나무에서 고유의 향기와 정이 흐르니 무엇을 더 바라랴. 그러나 이 넓은 정원에 추억이 어린 감나무 한 그루 없는 것이 늘 아쉽다.

시골집 늙은 감나무 아래에 장독들이 즐비하다. 늦가을이 되면 곱게 물든 감나무 낙엽이 장독대에 쌓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늦가을 정취를 맛보고 즐기기로 감나무 단풍만한 것도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 고향이 떠오르고 그리운 어머님의 살뜰한 정과 모습이 그려지는 정감 어린 나무이다.

어머님이 평생 해오던 정성스러운 의식을 따라 해 볼 참이다. 옛정이 그리워 당신이 쓰던 항아리를 우리 집으로 옮겨온다. 장독을 뒤꼍에 두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담는다. 또 소소한 물건을 담는 수납 용기로도 활용한다. 찬바람 부는 겨울 초입에는 어머님의 따스한 손길이 그리워 지리산 끝자락 악양의 감을 찾는다. 올해도 홍시를 만들 요량으로 주먹보다 더 큼직한 대봉시를 네 상자나 주문한 것이다.

어머님의 손때가 묻은 단지에 볏짚을 켜켜이 깔고 대봉시를 가득 쟁여 놓는다. 겨우내 기온 차로 감이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다 보면 땡감이 홍시가 되리라. 대봉시가 익을 때면 단지 주변에는 단내가 풀풀 나기 시작한다. 볏짚 속 발효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홍시를 만드는 것 같다. 단지 뚜껑을 열자 홍시의 단내가 코를 찌른다. 어머님의 품에서 맡던 냄새다. 마치 딱딱한 내 가슴이 홍시를 보자 넉넉한 가슴으로 반응하듯 그리운 냄새를 찾은 양 단내를 쫓는다.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이 하나둘씩 멀어지며 아쉬움을 더해가는 겨울밤이다. 지나간 계절의 아름다운 풍경과 사물들이 뇌리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 쓸쓸함과 적적함을 달래고자 아내가 장독에 쟁인 홍시를 꺼내온다. 탁자에 올려놓은 홍시가 유년시절의 그리움을 불러낸 것이다. 산모롱이를 지나 마을 어귀에 듬성듬성 자태를 뽐내며 의연히 서 있는 감나무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듬지에 매달린 까치밥이 드러난다. 서설이 묻은 홍시가 푸른 하늘에 둥둥 떠 있어 더없이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그 시절엔 당신의 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병약한 자식을 바라보는 애타는 마음이 홍시에 절절히 배어 있음을. 내 자식 귀한 줄만 알았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로움을 모르고 세월이 흐른 것이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당신 생전에 긴 겨울밤 출출한 빈속을 달랠 홍시 한 알 올리지 못함이 두고두고 죄스럽기만 하다.

강전섭 수필가

정원에 심을 감나무를 가슴에 심는다. 동안에 묵은 빚을 갚고 싶어서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시골의 정취도 마음껏 누리고, 감을 따다 항아리에 쟁여두었다가 지인에게도 나누고 싶다. 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지나가는 길손의 배고픔도 살피고, 무엇보다 당신의 살뜰한 정과 그 모습을 내 가슴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다. 겨울이 깊어지면 홍시의 단맛도 깊어지리라. 아내가 장독에서 꺼내 온 홍시의 속살을 한 수저 뜨다 당신의 얼굴이 어른거려 도로 내려놓는다. 시골집에는 홍시를 품어가도 반가워 해 줄 부모님이 안 계시다. 서글픈 내 처지와 꼭 닮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枾歌)"로 불효한 마음을 읊어본다. 끝내 참았던 눈물이 홍시 위로 한 방울 뚝 떨어진다.

강전섭 수필가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및 운영위원장
▶ 청주문화원 이사
▶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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