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윤여군 국장대우겸 남부3군주재기자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 클립아트코리아

촛불민심이 탄핵정국을 넘어 이념대립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촛불민심이 대선정국을 주도해 정치권이 주권자인 국민들을 가볍게 보고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거의 정치 답습을 단절시키기를 바랬다.비민주적인 정치행태에 분노한 촛불민심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더욱 승화된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한층 더 발전 할 수 있는 계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16차례에 걸친 촛불집회는 보수와 진보의 목소리가 혼재하는 이념의 장으로 변질되고 순수한 국민들의 목소리는 이들에게 밀려난 느낌이다.

최초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모든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로 시작됐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매우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본 사람중에 하나이다.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시민재판에서 우매한 대중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 민심은 어쩌면 플라톤의 생각처럼 촛불민심에 의해 심판을 받는 다고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플라톤은 완전한 지혜를 갖춘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철인통치는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려웠다. 완전한 지혜를 갖춘 성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치 않았다. 17세기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을 통해 시민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권리장전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시민들은 불합리한 권력과의 투쟁을 지속했고 주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인식속에 끊임없이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 결과, 오늘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고 주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흐름들이 민주주의와 법치가 조화를 이루는 보편적인 통치체제가 된 배경이다. 민주주의 성패의 가장 핵심은 시민들의 역량이었다. 그리스 민주주의 실패는 자기 이익만을 중시했던 시민들의 의사결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체제를 정립해 나간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색깔논쟁과 지역감정, 포퓰리즘 등 자극적인 프레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력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면밀히 분석없이 색깔론에 휘말렸고 인물 검증에 앞서 당을 따랐다. 정책의 현실성과 부작용을 검토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얼마나 어떻게 돌아 올지 유불리를 따졌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현실은 국민들이 생각을 기피하고 검증을 귀찮아하고 의심을 소홀히한 댓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들은 실현가능한 정책보다는 지역색을 이용한 표를 얻기 위한 정책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조훈현 기사, 이만기 선수 등 입법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이 인지도 하나만으로 비례대표 또는 공천을 받는 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이다.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투표는 진실한 공약을 내건 사람을 뽑는 기회가 아닌 정권 심판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고 열광과 분노의 감정이 지배했다.

민중을 개, 돼지라고 비웃는 현 정권의 고위 관료들의 인식은 어쩌면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유권자가 냉철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법을 위반하고 경거망동한 권력을 처벌하는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도덕성이 결여되고 역량이 부족한 후보들이 앞다퉈 나설 것이 뻔하고 그들을 선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왕과 귀족들처럼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 들 것이고 국민들은 불평과 상실감으로 무기력한 신민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윤여군 국장대우겸 남부3군주재기자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대선이 예상되고 있다. 유권자들도 이제는 '이성적 투표'가 필요할 때이다. 더 이상 지역감정과 색깔논쟁과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말고 군림하려는 정치인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최순실 게이트가 보여준 후진국형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선진국형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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