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상준 중원포럼 이사장·충북대 명예교수

무심천 벚꽃 / 중부매일 DB

해마다 4월 초 무심천 둑방에 화사하게 핀 벚꽃은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벚꽃은 피어있는 모습도 화려하지만 떨어지는 모습 역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벚꽃은 벚나무의 꽃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벚나무는 20여 종류가 있지만 벚꽃축제의 대상이 되는 종은 왕벚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무심천 벚나무 역시 왕벚나무인 것이다.

언제부터 왕벚나무가 조경수나 가로수로 심겨졌을까? 1909년 서울 창경궁 춘당지(春堂池)에 일본산 왕벚나무 묘목을 심은 것이 최초이고,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되던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 주도로 경남 진해시 도로변에 2만여 그루의 왕벚나무 묘목이 식재되었다. 이때는 우리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의병들의 항쟁이 계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1935년 서귀포시 일주도로에 대량의 일본산 왕벚나무를 심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식재되기 시작하였다. 무심천에도 일제강점기 때 식재된 아름드리 왕벚나무가 있었지만 1978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무심천 둑방에 2차선이었던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기 위한 공사를 하면서 왕벚나무를 잘라내 버렸다.

1962년 4월 15일 왕벚나무가 우리나라 토종나무이고 제주도 한라산이 원산지라는 학계의 보고가 있는 후 국민감정이 변하면서 다시 식재하게 되었다. 무심천의 경우 1984년 굵기 8~10cm 정도의 왕벚나무를 다시 심은 것이 해마다 4월 무심천을 수놓는 지금의 왕벚나무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무심천을 비롯하여 전국에 식재된 왕벚나무는 순수한 토종 벚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벚나무 하면 우리는 으레 한라산의 왕벚나무를 연상한다. 1908년 4월 14일 한라산의 관음사 부근에서 선교활동으로 서귀포시 서흥리 성당에 와 계시던 프랑스 출신 다켓 신부(한국명 엄택기)가 꽃이 피어있는 왕벚나무를 채집하여 벚나무 연구의 권위자인 독일 베를린대학의 쾨네 교수에게 보내졌으며 1912년 왕벚나무는 한라산이 원산지라고 발표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왕벚나무의 원산지에 대해 일본은 자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전자 분석에 의해 한라산이 원산지임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즉 왕벚나무는 한라산에 자생하는 올벚나무, 벚나무 그리고 산벚나무의 3종이 자연적으로 교잡되어 만들어진 복합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라산에는 해발 165m에서 853m에 걸쳐 173개 지역에 왕벚나무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어린 나무에서부터 수령 265년의 노거수가 많으나 일본에는 그런 수령의 개체가 하나도 없다.

강상준 충북대 명예교수

일본이 주장하는 왕벚나무는 '오시마자쿠라(大島櫻)'의 꽃가루를 '히간사쿠라(彼岸櫻)'의 암술머리에 인위적으로 묻혀 교배한 원예품종으로서 '쇼메이요시노사쿠라(染井吉野櫻)'라고 이름을 붙였다. 1901년 마쓰무라(松村)가 이 교배종을 신종으로 발표함으로서 일본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일본산 왕벚나무 묘목은 지금도 수입하여 판매되고 있다. 이제는 일본의 왕벚나무가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의 왕벚나무를 모수(母樹)로 하는 후손의 나무를 식재하여 우리나라의 토종 벚꽃을 즐겨야 할 때가 되었다. 고향이 일본인 무심천 왕벚나무의 수명이 다 하는 날에는 그 자리에 일본이 아닌 한라산의 왕벚나무 후손을 심어 아름다운 벚꽃축제를 보게 되는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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