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 교수의 역사에 비춰보기] 윤진 충북대 사학과 교수

오늘은 4.19혁명 57주년이 되는 날이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여러 가지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고, 이는 정치적 요인만이 아닌 사회, 경제적 요인도 복합된 것이었다. 농촌 사회가 붕괴되고 도시에 인구가 몰렸으며,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었고, 정경유착이 심각했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권 연장을 위한 일명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까지 나오게 되자 참고 기다리던 민심도 터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4.19혁명은 그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였는가? 지금도 사회에 실업 문제와 계약직 문제가 폭주하고 있고, 정경유착이나 측근 비리 문제까지 나왔으며, 대통령의 탄핵까지 진행되었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역사를 더듬어보면 무수한 '혁명'들이 있었다. 필자가 지금 떠올리는 혁명은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파르타 혁명'이다.

기원전 3세기 중후반의 스파르타는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던 메세니아 지방이 독립해나간 후, 심각한 사회적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파르타의 전통 체제에서 시민들은 국가에서 나누어준 토지를 가지고, 그 땅에서 일하는 국가 소유 노예들을 부리며 수확량의 절반을 받아 세금이나 교육비 등을 감당해왔다. 그런데 국토의 절반가량이 떨어져나가게 되자, 거의 절반의 시민들이 당장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이쯤 되는 상황이라면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그들을 몰락에서 건질 조치를 취했어야 할 터인데 스파르타의 기득권층은 자신의 이익이 감소하는 것을 꺼려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먹고 살 길을 상실한 스파르타 시민들 중 상당수는 무장도 갖추지 못하거나, 교육도 받지 못하게 되어 국방력도 감소하고 사회적 불만도 커졌다. 심지어 시민 수도 감소하고, 일부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이등 시민'이 급증했다. 이들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그저 사회가 뒤집히기만을 바라게 되었다"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 왕 아기스 4세(기원전 244~241년 재위)는 국가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채무의 말소와 토지 재분배를 통한 시민단의 확대를 기획했으나,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던 또 다른 왕가의 왕(스파르타는 2왕제 국가였다)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보수적 귀족들에 의해 저지되고 본인도 살해되고 만다. 그가 죽은 지 5년 후, 역설적이게도 레오니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 3세가 즉위하며 아기스 왕의 정책을 보다 과격하며 광범위하게 실행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죽은 아기스의 왕비 아기아티스는 레오니다스에 의해 어린 클레오메네스와 재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젊은 새 남편에게 전 남편의 이상을 알려주고 행동하게끔 격려했다고 한다. 클레오메네스는 채무를 말소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여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부국강병의 길을 추진해 나간다. 그는 성공적으로 국가를 다시 만들어갔지만, 결국 그리스 북부의 초강대국 마케도니아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보수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도 문제이고 강력해진 스파르타는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스파르타는 다시 어려워지지만, 아기스와 클레오메네스의 용기와 결단은 약 30년 후 나비스라는 또 다른 왕의 개혁으로 이어진다.

윤진 교수

새 봄, 대선을 향한 레이스가 막 시작됐다. '헬조선'을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줄, '경제민주화'의 '혁신적' 공약과 그 이행을 기다려본다. 빈부의 큰 격차와 사회적 불만은 결국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므로. 소수에 의한 이익의 독점은 결국 국가 전체의 쇠락과 몰락으로 이어져서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므로, 희망을 보여주는 '혁신'을 오늘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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