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최근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최민식 주연의 정치영화 '특별시민'은 19대 대선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하다. 차기 대권을 꿈꾸는 현직 서울시장의 3선도전기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온갖 협잡과 배신, 흑색선전, 마타도어, 가짜뉴스, 언론플레이까지 진흙탕 선거판의 더러운 실상이 리얼하게 펼쳐진다. 극중 검사출신 국회의원 입에서 "정치는 똥통에서 진주를 찾는 것과 같다"는 그럴듯한 대사가 등장하지만 선거가 끝나도 '진주' 대신 비릿한 악취가 멀쩡했던 후보 주변까지 오염시킨다. 세명 후보의 지지율이 시시각각 요동치는 과정에서 클라이막스는 예상대로 후보 단일화다.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카드이기 때문이다.

고착된 선거 구도를 흔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패는 후보단일화다. 단일화했다고 해서 당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사만 된다면 당선에 근접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대선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민주당 노무현 후보, 국민통합 21 정몽준 후보의 3파전 구도에서 이회창은 노·정 후보에 비해 10%포인트나 격차를 벌리며 여유 있게 앞서나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성사되자마자 43.5%로 이회창(37%)에 역전했다. 노무현은 지방선거 참패와 DJ 아들 비리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3위로 달리다가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제의라는 통 큰 승부수로 드라마틱한 역전극을 쓰면서 대권고지에 올랐다.

단일화는 역대 대선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다. 1987년 대선때 당시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야권지도자였던 김영삼(YS)·김대중(DJ) 전대통령의 독자출마가 학습효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YS와 DJ가 각각 28.0%, 27.0%로 정권교체의 열망을 분열시키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역대 최소치인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군부출신에게 대통령 직을 안겼다는 엄청난 국민적인 질타가 이어졌다. 이 때부터 후보단일화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됐다. 전혀 이질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과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가 97년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해 소위 'DJP 연합'을 출범시켰다. 정치적 성향으로는 이질적이지만 호남과 충청이라는 지역표심을 묶을 수 있는 유용한 전략이었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하지만 단일화도 나름 형식을 갖춰야 파괴력을 갖는다. 2012년 18대 대선에선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며 자연스럽게 단일화가 됐지만 합의가 아닌 안 후보의 포기로 이뤄져 극적인 효과를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19대 대선은 5자구도지만 진보성향(문재인·심상정)과 중도·보수성향(안철수·홍준표·유승민) 어느 쪽도 지지율 50%를 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대략 20~25%의 부동층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만큼 후보단일화가 대선막판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변수다. 하지만 보수후보들이 차기를 노리고 명분을 내세우며 독자 완주를 밝혀 단일화는 보수층의 희망사항이 됐다. 이번 대선은 보수의 분열과 막연한 역전에 대한 기대로 '후보단일화'가 없는 매우 드믄 선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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