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홍준표 전 경남지사 대선 유세 자료사진 / 뉴시스

지난 주말 땅끝마을, 남도답사 1번지로 불리는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길을 다녀왔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초당은 다산(茶山)이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은 1801년 강진에서 18년간 적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으나 젊은시절 승승장구하던 벼슬에서 파직돼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오랜 세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무척 외롭고 곤궁(困窮)했을 것이다. 당시 강진사람들은 귀양 온 선비에게 겁을 먹고 앞다투어 달아날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의 심경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다산은 자신의 가족을 폐족(廢族)이라 표현했다. 폐족은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을 이른다. 그가 저술에 몰두했던 것은 감내하기 힘든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폐족이 유명해진것은 안희정 충남지사 때문이다. 그는 2007년 12월 26일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친노 세력의 처지를, '폐족'에 비유해 친노 진영 안팎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정권은 한나라당(이명박)에게 넘어가고 임기를 마친 노 전대통령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안희정은 "친노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라고 말했다. 통렬한 자기반성이라는 말도 나왔고 친노의 자기 비하(卑下)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 '폐족'이 이번 대선이 끝난뒤에도 다시 등장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선후보가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친노 폐족의 재집권'이라고 규정하며 보수 쇄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노 폐족들이 다시 집권한 것은 그들이 철저히 이념집단으로 무장돼 있기 때문"이라며 "이번 선거를 통해 복원된 자유한국당을 더욱 쇄신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준표 전후보가 친노에게 폐족이라고 손가락질 할 처지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대선패배 뒤에도 치열한 자성과 성찰이 없다. 대선기간 뭉쳐도 힘든 판에 갈기갈기 찢어져 선거 내내 서로에서 총구를 겨누었다. 이번 대선에서 확인된 보수정권 10년 진보정권 10년 주기설이 또 다시 되풀이된다면 보수정당은 더 처절하게 무너져야 일어 설 수 있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안 지사는 몇년전 기자의 '폐족'에 대한 질문에 "이런 질문을 받을때마다 곤혹스럽다"며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이후 새누리당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달도 찼다 기울었다 한다. 여야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정권도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엔 민주당의 부활을 기대했던 말이지만 민심의 무서움을 토로한 말이기도 하다. 다산도 민주당도 폐족을 딛고 일어섰다. 보수정당도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홍준표의 폐족 발언은 대상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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