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용호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

청주고인쇄박물관 / 중부매일 DB

1661년 어느 날 청주 부모산 부도암에 죽마고우인 양반 11명이 모였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자 회갑까지 우정을 변치 말자는 의미로 계(을축갑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후 모임이 꾸려지면서 세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탈퇴했으며, 상민 2명이 가입해 9명이 됐다. 1686년 겨울, 청주 낙가산 보살사에서 계원 9명과 그들의 자제들이 다시 모였다. 회갑을 맞이하면서 25년간 이어져온 을축갑회의 대단원을 마치기 위한 자리였다. 회갑잔치가 무르익자 보살사 화승(畵僧) 의인이 말했다. "이 모임은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중략) 자손들이 함께 그림을 보며 여러분의 행적에 존경심을 가질 것입니다" 의인이 그린 그림 9점은 계원 9명이 각각 나눠 가졌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696년 계원의 후손들은 선조의 모임을 추모하기 위해 내수읍에 죽림영당을 건립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제향하기에 이른다. 330년이 지난 현재 을축갑회는 '죽림영당관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이야기를 담은 '죽림갑계문서'와 '을축갑회도' 3점은 현재 행방이 알려져 있다. 죽림갑계문서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을축갑회도 3점 중 2점은 고인쇄박물관, 1점은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충북유형문화재 135호로 지정된 큰 그림,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작은 그림 1점,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1점이 있다.

작은 그림은 1686년 회갑잔치에 의인이 제작한 그림이고 큰 그림은 19세기 무렵 새롭게 베낀 그림으로 보인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1686년의 회갑잔치에 의인이 제작한 9점중 두 점은 고인쇄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죽림갑계문서와 새롭게 베낀 그림은 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들이다. 필자는 청원군 학예연구사 시절인 2013년 죽림영당관리위를 찾은 적이 있다. 17세기 승려가 그렸다는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은 터였다. 하지만 을축갑회도의 인물들은 19세기 화가의 그림에 표현된 인물과 비슷하게 표현돼 있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관리자가 "실은 작은 그림이 하나 더 있는데,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겠냐"라며 또 하나의 그림을 꺼냈다. 그림은 17세기 승려가 그린 그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후 2015년 필자가 고인쇄박물관 재직시절 죽림영당관리위원회가 을축갑회도 2점과 죽림갑계문서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2년 전 아쉬움에 작별했던 작품들을 이제 직접 관리하게 된다니, 그간의 학예연구 업무에 대한 보람과 책임을 함께 느낀 순간이었다. 당시 청주시 공무원으로서 죽림영당관리위원회 회원들에게 감사한 부분은 청주·청원 통합 1주년을 맞아 청주시의 발전을 위해 기증했다는 점이다. 청주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직지심체요절을 비롯해 용두사지 철당간, 상당산성, 안심사 괘불 정도이다. 을축갑회도도 이들과 한 자리에 놓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시대 청주의 각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가문들이 선조의 우애와 향후의 화합을 기념하기 위해 9점을 제작해 나눠가진 것은 통합시의 의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문용호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7년, 문화재로 지정된 큰 그림은 수리를 위해 잠시 박물관을 떠나 있고, 작은 그림은 문화재 지정을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청주의 역사를 담은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고 널리 알리는 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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