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주명덕 작 금강산 2001

필자는 주명덕의 사진집 <잃어버린 풍경>에 당나라 시대의 동산양개 스님의 게송 두 수가 실려 있다고 말했다. 그 게송 한 수는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다. 오늘은 두 번째 게송에 관해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운암은 동산의 게송을 듣고 난 후 그에게 즐거운가 물었다. 동산은 "어찌 즐겁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진주(明珠)를 주운 것 같은 기분입니다"라고 운암에게 답변했다. 동산은 운암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스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뒤 누가 저에게 '당신의 스승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운암은 침묵하다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산은 운암과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면서 운암이 말했던 '바로 이것이다'를 되새겼다. 그는 어느 지역에선가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우연히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바로 이것이다'라는 참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하나의 게송으로 남겼다고 한다. 바로 그 게송이 다름아닌 주명덕이 인용한 두 번째 게송이다.

다른 곳에서 그것(我)을 찾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너를 떠나리라. 이제 나 혼자 스스로 가니 어디에서나 그것을 만나리. 그것은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필자는 주명덕이 '그'라고 번역한 '나' 아(我)를 '그것'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주명덕이 번역한 '본래의 얼굴'은 흔히 진여(眞如)와 동의어라고 간주되는 여여(如如)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것'을 '풍경'으로 그리고 '본래의 얼굴'을 '경(景)'으로 전이시켜 보고자 한다.

다른 곳에서 풍경(我)을 찾지 말라. 오히려 풍경은 너를 떠나리라. 이제 나 혼자 스스로 가니 어디에서나 풍경을 만나리. 풍경은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풍경이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경(如如)과 하나가 된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어둔 방(camera obscura)'이 아니다. 어둔 방은 당신을 몽매(혼동)상태(obscurantisme)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고 그의 사진이 바르트의 '밝은 방(camera lucida)'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밝은 방은 계몽주의로 빠트리기 때문이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몽매도 계몽도 아닌 그들 사이에서 '불-명료한(ob-scura)' 것으로 나타난다.

어둠은 밝음의 망각이고, 밝음은 어둠의 망각이면서 동시에 어둠은 밝음의 기억이고, 밝음은 어둠의 기억이다. 그렇다면 필자를 찌르는 것은 '푼크툼(punctum)'이 아니라 오히려 푼크툼의 '맹점(盲點. punctum caecum)'이 아닌가? 문득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이 떠오른다.

사진의부진? 그것은 '말은 다 하였으되 말하고 싶은 뜻은 아직 그냥 남아 있음'을 뜻한다. 아니다! 필자는 뜻은 고사하고 아직 말도 끝내지 못했다. 주명덕은 사진집 <잃어버린 풍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진작업(寫眞作業)을 하면서 내가 풍경사진(風景寫眞)을 찍는 것에 대한 이유(理由)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그리고 이 사진(寫眞)들에 대한 논리적(論理的)인 근거(根據)를 되묻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런 답(答)을 얻을 수가 없다. 그저 좋을 뿐이며, 10여년간(十余年間)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진(寫眞)들은 지금껏 내가 해온 사진중(寫眞中)에서 처음으로 '나를 찾은 사진(寫眞)'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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