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병학의 사진학교] 43.
나의 감정세계를 논리정연하게 표연한 풍경
세월의 흐름을 통해 스스로가 얻게 된 깨달음

주명덕 作, '대기리 2005'

주명덕은 30여년 넘도록 찍은 풍경사진을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잃어버린 풍경'을 '나를 찾은 사진'이라고 진술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진작업에 대해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가 그의 사진들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는다. 와이? 왜 그는 자신의 사진들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말하지 않는 것일까? 혹 그는 자신의 풍경-사진을 보는 사람의 몫으로 두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테면 깨달음은 누구에게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명덕은 우리에게 풍경-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운암이 동산에게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풍경-사진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닐까? 주명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20代는 물론 30, 40代初까지만 해도 나 자신 사진(寫眞)에 대해 할 말이 많았고, 내가 속해 있는 사회(社會)에서 사진과 사진가(寫眞家)의 역할(役割)에 대(對)한 소견(小見)을 곧잘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사진에 대한 모든 생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낀다."

그러면 주명덕이 '자신을 찾았다는 사진'은 이전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혹은 진술했던 모든 생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잃어버린 풍경이 아니라 풍경에 대한 오합지졸의 사념들을 잃어버린 풍경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의 잃어버린 풍경이 아니라 과거의 풍경을 잃어버리도록 한 풍경이라고 말이다. 주명덕의 진술을 더 들어보자.

"나의 풍경사진들은 나의 감정세계(感情世界)를 표현(表現)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논리정연(論理整然)하게 설명한다거나 미화(美化)시킬 수가 없다. 이 사진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내 사진에 매료되어 내가 느낀 것 그 이상으로 나의 사진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 가기를 기대한다."

그렇다. 주명덕은 자신의 사진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거나 미화시킬 수가 없다고 말했지, 자신의 사진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거나 미화시킬 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는 그 논리정연한 언급을 피하는 걸까? 지나가면서 말했듯이, 그건 누구에게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어느날 운암 스님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동산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동산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운암 스님을 모시고 계실 때 무슨 특별한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동산 왈, "내가 그 분을 모시고 있었지만 별다른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네."

제자가 다시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하시다면 어찌 제사를 차리고 받들어 모시고자 하십니까?" 동산 왈, "내가 어찌 그 분을 저버리겠는가?!" 제자는 또 다시 스승에게 묻는다. "스님께서 제일 먼저 찾아 뵌 분은 남전 스님이신데, 왜 남전 스님 대신 운암 스님의 제사를 지내시려 하십니까?"

동산 왈, "나는 결코 운암 스님의 덕망과 학식 때문에 그 분을 받드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그 분이 그 비밀을 나에게 설파해 주지 않았던 바로 그 점 때문에 내가 그 분을 존경하는 것이지."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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