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兩班)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1~9품까지 양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문반이 요직과 재산을 독점하고 무반은 호위병정도의 역할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무장인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렸고 문신인 한뢰(韓賴)가 술좌석에서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빰을 때린 이른바 회식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정중부는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와 함께 거사하여 무인들을 천대하던 문인들을 휩쓸었다.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을 옹립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무인정권의 핸디캡은 효율적인 행정을 펼치지 못하는데 있다.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宋有仁)은 문신인 문극겸(文克謙), 한문준(韓文俊)과 연줄을 대며 그 공백을 메꾸어 나갔으나 얼마안가 그 고리도 끊어지게 되었다. 무인들은 의종의 사저 마저도 자신들이 차지하였다. 임금은 허깨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무인들의 행패를 보다못한 청주출신 경대승(慶大升)은 허승(許升)등과 함게 거병하여 명종8년(1178) 무신의 난을 일으켰던 정중부와 그의 아들 균(筠), 사위 송유인 등을 토벌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경진(慶珍)의 아들로 태어난 경대승은 청렴했다. 부친이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헌납할 정도였다. 정권을 잡은 후에도 허승, 김광립(金光立) 등이 자신의 공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 다시 이들을 처단했다.
 경대승은 신변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국정을 펼치는 기관으로 중방제(重房制)를 실시하였으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뒤 무인정권은 이의민(李義敏)에게로 넘어간다. 이의민 또한 앞서 정권을 잡았던 무인들과 다를게 없었다. 이의민의 아들인 지순, 지광, 지영도 덩달아 권력의 롤러코스터에 승차하였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듯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다. 이들 또한 최충헌(崔忠獻) 최충수(崔忠粹)형제에게 넉 아웃이 되며 물거품처럼 권좌에서 사라져 갔다.
 고려 중기 무인시대는 약 1백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무인들의 행패로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으며 왕은 꼭둑각시였다. 무인들은 마음대로 임금을 폐하고 옹립하였고 제멋대로 세금을 매겼다.
 그 암흑의 터널은 다시 만적(萬積)의 난으로 이어지며 사회를 더욱 혼돈속으로 몰고갔다. 만적은 최충헌의 가노(家奴)였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초기에 무단정치를 실시하였다. 5.16, 12.12 사태로 얼룩지었던 격동의 현대사도 있었다. 요즘 ''야인시대''에 이어 ''무인시대''가 안방극장을 주름잡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돌면서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가 보다. lbm@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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