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이야기] 차의 여정 '다산 정약용을 만나다'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이 평화롭고 바람에 살랑대는 코스모스가 더없이 상쾌한 날. 고즈넉한 이곳 초가삼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덥수룩하게 덥혀있던 초가의 볏짚이 들썩거리고 시원하게 터진 대청마루에는 선남선녀들의 속삭임이 붉게 익어 가는데. 앞마당에서 올라오는 차 이내(烟霞)는 꼬리를 흔들며 구름 속으로 승천한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왔어도 넓은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빼곡하다. 일 년 지 농사의 결실을 맺고 수확하는 미래지공원의 축제장. 넓은 주변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들판 가운데는 뾰족한 천막들이 마을을 이룬듯하다. 농산물 야생화 먹거리 등, 구경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올핸 어떤 차 자리를 준비할까. 각양각색의 문화가 등장하는 요즘, 의식주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특히 다양한 음료 문화가 판을 치는 지금 차(茶)를 마셔야 하는 중요성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고민을 했다. 차 마시는 방법을 쉽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차의 뿌리를 알리고 전통을 살려 차 문화의 발전에 일조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단순히 "차가 건강에 좋아요"라고 하면서 시음만 하게 한다면 물과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싶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생각했다. 차(茶)를 많이 마시고 아끼고 사랑하여 다산(茶山)이라는 호를 가졌다는 정약용 선생.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차 문화가 존재했을까. 문헌 속에는 차를 즐기고 사랑한 훌륭한 학자들도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꺼져가는 차의 불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다산은 한국차문화의 중흥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의 선사 역시 다산선생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다성으로 추앙받는 그 위상을 세울 수 없었지 싶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남긴 차 문화적 가치를 알린다는 일이 가슴 뿌듯할 뿐이다.

긴 대청마루에 체험할 다도구를 나열하고 마당에는 차에 맞는 테이블세팅을 준비했다. 체험과 시음에 필요한 많은 도구들을 이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선비차 도구와 말차 도구. 그리고 테이블세팅에 관한 도구들. 생각은 다산 선생이 강진의 초당에서 사용했다는 다조, 약천, 차 맷돌, 차 화로, 차 바구니 등을 그대로 실현하려 했었다. 그래서 우리 차의 순수한 멋과 우수성을 한껏 뽐내고 싶었지만, 역사성을 인식하는 문화를 재현하는 일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정지연 원장

차의 독성을 눅게 하기 위해 다산은 삼증삼쇄나 구증구포를 이용해 떡차를 개발했다. 채식 위주의 담백한 음식을 즐겨먹는 우리의 체질에 맞는 떡차가 대중화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기회가 된다면 다산의 떡차를 제다해서 마시는 과정까지 재현해보리라 마음먹어본다. 그래서 우리 차의 전통을 살리고 인스턴트식품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건강을 돕는 길잡이가 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산에게 차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약이었다. 비단 건강 때문에 차를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양지의 척박한 생활에서 오는 울화증과 비통함을 차로 다스리고, 18년의 긴 유배 생활동안에 500여권의 방대한 경서를 저술한 다산에게 차는 신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홍시 빛 태양이 저물어 간다. 참으로 의미 깊은 청원생명축제였다. 초당에서 다산의 업적과 숨결을 큰 사발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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