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때의 명신인 윤회(尹淮)는 소문난 애주가였다. 그는 술을 마시고 툭하면 서연에 참석치 않았다. 세종은 윤회에게 「하루 석잔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윤회는 또 대취하여 입궐하였다. 대사헌 이승직은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세종이 윤회에게 어명을 어긴 것을 따지자 윤회는 「어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윤회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석잔이상 마시지 말라하셨지만 잔의 크기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버러기(큰 그릇)로 석잔만 마셨습니다」
 윤회의 거침없는 대답에 장난기가 발동한 세종은 「세 문제를 맞추면 용서하고 못 맞추면 벌을 내리겠다」며 퀴즈를 내었는데 윤회는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이를 모두 맞추었다. 주변의 중신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고 세종은 「과연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을 겸비한 인재」라며 크게 웃고 말았다. (김예식, 선인들의 삶)
 일제시대, 시인 변영노가 주삼선(酒三仙)으로 통하는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과 남산 사발정 약수터에서 대취하였다. 취흥이 무륵 익었을때 멀쩡하던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옷을 모두 찢어버리자」는 공초의 제안에 따라 넷은 알몸이 되었다.
 네 나한(裸漢)은 소나무밑에 매어둔 네마리의 소를 타고 성균관을 거쳐 창경궁을 돌아 시내 복판으로 진입하려다 실패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의 토로였다.
 옥천출신인 시인 정지용은 만취하면 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팬티만 입은채 배를 두드리는 주벽이 있었다고 한다. 만취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지식인의 고뇌였다. (전태익, 예술인들의 괴벽과 기행)
 「꽃 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된다/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못 마셔도/ 그들과 더불어 이 봄 밤 즐기리...」 이백의 그 유명한 월하독작(月下獨酌)이다.
 공자도 술을 사양치 않고 마셨지만 결코 어지러운 정도에 미치지 않게 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면 술에 대한 예찬론과 해악론이 줄기차게 맞서고 있다. 보들레르는 「근로는 나날을 풍요롭게 하고 술은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고 F. 로가우는 「술이 만들어 낸 우정은 하룻밤 밖에 효용이 없다」고 경계했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작용이 있으나 도를 넘으면 시비거리를 낳고 몸을 망치게 된다.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술 소비국으로 알려졌다. 술자리에서 보면 폭탄주에다 노털카 등 희한한 음주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1차에 끝내지 않고 2차, 3차를 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의 음주습관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대학가 일각에서도 건전한 음주문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한다. 억지로 술을 먹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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