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연하장
아버지와 연하장
  • 중부매일
  • 승인 2018.01.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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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새 해 첫새벽 두 손을 모은다. 하도 다사다난했던 정유년이라 국태민안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 도심의 전구들은 꽃처럼 피어나서 황금빛 새해를 밀어 올리고 이내 스러져간다.

혹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흘러가는 세월인데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들이 권태로워서 매듭을 만들었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제의 사람들이 내일을 살아간다고.

아무리 같은 날이라도 연월일 구분을 지어, 새해를 맞으며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게 한 선인들의 지혜는 참으로 훌륭하다. 새해 아침이 더 행복한 것은 지난해를 반성하며 부픈 마음으로 신년 계획을 세우게 하는 푸른 꿈이 있어서다.

미국 시인 사무엘 울만은 "나이를 먹었다고 늙는 게 아니고 꿈을 잃었을 때 바로 늙는다."라고 하지 않는가.

"근하신년"이라는 연하장에서"새 해는 공손하게 축하하면서 맞아야 한다."라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골에서 한약방을 하시던 선친은 시간이 나면 한 시를 초서로 즐겨 쓰셨는데, 어려서부터 먹 가는 일이 즐거운 나의 임무였다. 謹賀新年(근하신년), 日日是好日(일일시 호일), 日新又日新(일신 우 일신) 등을 정성스레 써서 낙관을 찍고 소망을 함께 넣어 친지들에게 보내셨다. 이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뿌듯했는데, 진중하게 배우지도 못하고 버린 휘호 한 장 간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연필 잡는 방법부터 먹 가는 것까지 가르쳐주셨던 최초의 스승인 선친은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우상이었다. 많이 배우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아버지는 사서삼경에 통달을 하셔서 교훈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시곤 했다. 늘 긍정적으로 말씀을 하고 칭찬을 하셔서 은연중'나는 잘하는 사람이고 사랑받는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이 형성되었지 싶다. 지나간 시샘을 이제껏 형제들한테 듣기도 하지만.

"고봉이 글 읽는 일에만 정신을 쓰다가 보리 멍석을 비에 떠내려가게 만든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의 이야기를 해주시며 간서치라는 호칭을 듣는 이유를 설명하셨다.

"군자도 생활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면 안 된다. 부모는 굶주린 지 오랠 것이니 논할 것이 못 되지만, 처자조차 보전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는 말씀을 부연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하셨구나.'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나중에 부언한 이 말씀이 공격의 대상이 될 줄은 당신도, 애지중지하던 자식도 몰랐다.

친구 빚보증으로 풍비박산이 나서 심신을 술에 겨우 의지하는 아버지한테, 철없는 딸은 좌절된 꿈 앞에서 당신이 알려주셨던 이 말씀을 그대로 돌려 드렸다.

세상에 길은 하나가 아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8남매나 낳아 놓고 어떻게 하실 거냐며 목소리를 높일 때 얼마나 힘들고 자책이 되셨을까. 그때 동생들은 더 어렸으니 박식하고 꼿꼿하시던 아버지를 떠올리지 못하고, 술에 취하신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채봉 시인은"만남"이란 시에서 가장 잘못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나는 생선과 같은 만남이고,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힘이 들 때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라고 노래했다.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는 오랜 후에 이 시를 읽고 많이 울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라서 부모 자식 간도 손수건과 같은 만남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되었다. 내가 글 줄이라도 쓸 줄 알고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의 덕이지 않는가.

이영희 수필가

근하신년이라 쓴 연하장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치암 중죄 금일 참회'라는 경구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은 이제 그 연륜이 되어서인가 보다. 아버지가 즐겨 쓰시던 고사성어의 뜻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야겠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타성에 젖어 살기 쉬운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기쁜 날이 되도록 미소 짓는 마음가짐은 삶의 등대가 되겠지. 잘 가꾼 하루하루가 모여서 아름다운 한 해가 될 터이니.

이영희 약력
▶1998년 '한맥문학'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 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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