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골 이야기
궁골 이야기
  • 중부매일
  • 승인 2018.02.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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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사진 / 김윤희씨 제공

여자의 기가 센 곳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내 세우는 마을이 있다. 바로 궁골이다. 궁궐터가 있어 그리 불리는데 행정명은 궁동이다. 그 지역 면장님이 꼭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다기에 찾아 나선 길이다.

마을 광장에 도착해 보니 '황후가 탄생한 풍경이 아름다운 생거진천 궁골 마을' 이란 큼지막한 글씨와 함께 아름다운 왕비의 모습이 먼저 화사하게 객을 맞는다. 올린 머리에 금관을 쓰고 길게 늘인 금 귀걸이가 붉은 옷과 어울려 산뜻하면서도 기품을 더하고 있다. 기황후다. 진천의 기씨 여인이 중국 원나라 황후가 되었다는 전설 속의 여인이다. 어린 시절 만화책에서 보았던 황후의 모습이 딱 그랬던 것 같다.

처음 이 장면을 맞닥뜨린 순간, 절로 웃음이 배실배실 미어져 나온다. 어찌 이리 깜찍하고 기발한 생각을 해 냈을까.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골목골목 여인의 모습이 등장하여 마을 담벼락을 따라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던 말이 언제부터인가 '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 하더니 이제는 아예 여자가 집 밖으로 나와 마을의 역사를 새로 엮고 있다.

진천군지에 의하면 궁골에 대한 전설이 두 가지로 전해온다. 그 중 하나는 중국의 원나라 홀필렬 황제가 배필을 찾던 중 한 지역에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어리고 있었으니 이월의 옥녀봉 아래 마을이었다. 상서로운 기운은 기씨 성을 가진 여인을 따라 움직이더란다.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아름다운 풍모가 천상배필 감이었다. 황제는 부모를 설득하여 기씨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황후가 태어난 곳에 궁을 지어 부모를 살게 했다하여 궁골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이런 전설이 유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시대적으로 볼 때 벽화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고려시대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기씨 여인이 황제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것이리라. 다른 나라 황후로 발탁될 정도이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받은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이를 좀 더 신성하게 바라보고픈 심리에서 비롯된 설화이지 싶다.

궁터가 있던 자리에 올랐다. 뒤로는 옥녀봉이 감싸 안고 앞쪽으로는 넓은 들녘이 훤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과연 황후를 낼만한 터임이 느껴진다. 이 좋은 터가 지금은 묵정밭으로 방치돼 있는 것을 보니 황후의 오라비들이 행했던, 힘 있는 자들의 갑질 그 끝을 보는 것 같아 가슴 한켠에 씁쓸한 바람이 치고 간다.

황제는 하늘이 낸다 했으니 그 아내 역시 하늘이 내린 사람일터,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원나라 황후라는 대단한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서기를 바로 다스리지 못한 탓으로 눈총을 받아 왔다. 그로인해 궁골 사람들은 황후를 떳떳이 입에 올리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랜 세월 근신하듯 조용히 지내던 동네에 서서히 새 기운이 뻗기 시작한 것은 '2017 풍경이 있는 농촌 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든 지역이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이라 했다. 아침에 내린 이슬을 소가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다. 같은 물이라 할지라도 인연에 따라 선이 될 수 있고 악으로 나타날 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악연을 선연으로 돌려 행해가는 것이 바른 리더의 덕목 아닌가.

마을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의 설화를 바탕으로 풍경이 있는 벽화와 이야기 돌담길을 조성하고 문화공간을 조성해 가고 있다. 전국적으로 낙후된 골목길을 벽화로 단장하면서 유명세를 누리는 곳은 많다. 그 중에서도 이 마을 벽화는 공녀로 간 기씨 여인이 황후가 된 이야기가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면서 마을 사람들이 아쉬워했던 부분까지 긍정적으로 승화해 나간다. 그가 잘하지 못한 부분을 탓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후대들이 선으로 돌려 나가자는 의도이다.

김윤희 수필가

또 하나 민속박물관으로 구상하고 있는 것이 상여박물관이다. 어린 시절 동네 끝자락에 있던 상여집을 지나칠 때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던 기억이 새롭다. 그저 상여 하나 넣어 두는 곳인데 왜 그리 무섭던지. 마치 이상하고 나쁜 기운이 몸으로 따라 붙는 느낌이 들어 뛰다시피 발걸음을 재촉하다 제 발소리에 소스라치지 않았던가. 그런 상여를 전국에서 모아 박물관을 만들 모양이다. 사라져가는 우리네 장례풍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리라.

기센 여인의 기를 끌어내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텃세를 제대로 해보자는 심산인 게다. 의식의 전환이 신선하다. 기골이 장대한 여걸, 기씨 황후를 앞세우고 다시 쓰는 궁골의 새 역사가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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