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作,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001. 2002'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43번 56도 지방도로에서 주한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압사 당했다. 54톤에 달하는 부교운반용 장갑차의 육중한 무게에 여학생들의 온 몸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참변을 당한 두 여학생의 이름은 신효순과 심미선. 그녀들은 친구의 열네 번째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어려서부터 단짝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함께 고통스런 죽음을 맞았다.

잔인한 사건에 대해 미군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빌미로 한국의 재판권 이양을 거부하고 미군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시켰다. "통신장애는 없었다"고 미군 스스로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방 30미터를 볼 수 없는 장갑차란 존재할 수 없다'는 장갑차 전문병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시야제한과 통신장애로 두 여중생을 죽였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결국 미군법정에서 살인미군들을 무죄로 평결했다.

노순택의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001'은 어느 여중생이 차도에서 미순이와 효순이의 영정을 들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물론 그 여중생이 영정을 들고 서있는 곳은 56번 지방도로가 아니라 서울 종로의 도로이다. 그리고 미순이와 효순이의 영정 옆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은 장갑차가 아니라 오토바이이다. 노순택은 그 사진 밑에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써 놓았다.

"아이야, 너의 머리는 어디에?" "내 머리는 으깨어졌다오. 뇌수가 길바닥을 흥건히 적셨다오" "쯧쯧. 누가 너희들을" "주한미군이 그리고 당신이" 아이들은 열 네 살이었다. 2002. 10. 3. 서울 종로

누가 미순이와 효순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주한미군이 그리고 당신이! 노순택은 열네 살 미순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대해 나와 당신에게 면죄부를 결코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단지 주한미군에게만 국한될 수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불평등한 한미관계는 주한미군과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평등한 SOFA는 개정되지 않고 있다.

미순이와 효순이가 처참한 죽음을 당한 2002년 6월 13일, 대한민국은 월드컵 열기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 다음 날인 6월 14일에도 한국은 포르투갈을 1:0으로 승리해 온 나라에 '대~한민국'이 메아리쳤다. 4년이 지난 2006년 6월 13일에도 대한민국 국민은 프랑크푸르트 경기장에서 열렸던 토고전에 '열광'했다.

언론들은 2002년 6월 13일과 마찬가지로 2006년 6월 13일 역시 월드컵에 '올인'했다. 미순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관한 진상규명이나, 미군부대 확장문제로 생활터전을 위협받고 있는 평택 대추리 주민들은 월드컵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현실에 당신과 나는 별다른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노순택의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001'은 열네 살 미순이와 효순이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작년 6월 13일 고(故) 신효순·심미선 15주기 현장추모제에 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 씨와 효순 양의 아버지 신현수 씨가 참석했다. 당시 미선양의 아버지 심현수 씨는 추모사에서 "15년 동안 함께 슬퍼한 시민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면서 "이 자리가 불평등한 한미 소파(SOFA)협정이 개정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권 변호사인 조영래 변호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들에게 뭘 했으며 지금까지 하고 있는가.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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