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서라벌로 향하는 문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천년을 이어온 역사의 돌다리를 건너는 게 어디 쉬우랴. 감포 앞바다에서 대종천으로 불어온 거친 해풍이 일행을 가로막으며 헤살 놓는다. 오만함으로 가득한 나를 칼바람이 사정없이 후려친다. 고개 숙여 예를 갖추라는 소리인가. 몸을 숙여 다가가 우러르니 감은사지 삼층 석탑이 담담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길가에서 바라본 삼층 석탑은 아담한 체구로 동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하지만, 석탑 가까이 다가갈수록 감포를 굽어보며 하늘을 향해 치솟은 자태가 우리를 압도한다. 정교함과 거대함이 통일신라의 위용을 자랑하는 듯하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자태에 넋을 잃는다. 통일 신라 석탑의 백미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다.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의 호국정신과 아들 신문왕의 효심이 서린 곳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용당산 자락에 절을 짓고 불력으로 호국 하려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에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잇고자 682년에 완성 후 '감은사'라고 짓는다. 감은사는 부왕의 명복을 빌고, 나아가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문무왕의 유지를 받든 아들의 깊은 속내가 담긴 사찰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은 감은사지 삼층 석탑은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통일신라 이전 평지 가람에서 산지 가람으로, 일 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최초 모습이란다. 이 쌍탑은 7세기 후반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 현존하는 삼층 석탑 중 가장 크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이 하나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 석재를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감은사지는 신라의 호국 성지요, 호국 가람의 진수다. 그 터전 위에 동서로 마주 보며 세워진 삼층 석탑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위상과 위엄을 잘 나타낸다. 통일신라 예술의 정수가 녹아든 탑으로 어떠한 장식이나 치장도 없는 거탑이다. 당당한 풍채에서 신라인의 자부심과 불심을 느낀다.

문득 감은사지 삼층 석탑에서 천 수백 년 전 신라인을 본다. 씩씩한 기상과 준수한 용모를 갖춘 신라의 두 청년이 우뚝 서 있는 듯하다. 탑을 돌아 서쪽 끝에서 사선으로 바라보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다. 어쩜 삼국을 통일한 화랑도 정신이 그대로 석탑에 반영되었는지 모른다. 그 속에는 통일국가가 세세연년 지속하기를 바라는 염원도 담겨 있으리라.

만물이 사라진 언덕배기 폐사지는 황량하다.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이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두 석탑을 휘감는다. 한바탕 찬바람이 휘젓고 지나간 자리엔 적막감이 흐른다. 폐사지 금당 터 주변에 나뒹구는 돌무더기가 신라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찬란한 왕조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문무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용혈을 보며,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대왕의 호국정신에 가슴이 뭉클하다.

삼층 석탑이 묵묵히 대왕암을 굽어보고 있다. 용이 되어 감은사와 대왕암을 오가며 바다를 지키고 국가 안위를 생각하던 문무왕은 말이 없다. 손짓하면 금방이라도 수중릉에 잠든 문무왕이 벌떡 일어나 감은사 금당으로 나타날 것만 같다. 감포 해변은 오늘도 신라 유민의 처절한 울부짖음처럼 밀려오는 거센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금당에 산 그림자가 드리우며 세찬 강풍이 나그네의 등을 떠민다. 감은사 영욕을 묵묵히 받아낸 수백 년 느티나무가 손짓하며 배웅한다. 순간 감은사지 뒤편 산기슭 대나무 숲이 출렁인다. 댓잎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소리가 들린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신령스러운 소리인 듯도 하고, 망국의 통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감은사지에 푹 빠진 내게 순식간에 나타난 현상은 환청일까 착시일까. 윙윙대는 대숲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문무대왕 부자의 슬픈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감은사지를 내려오며 생각에 잠긴다.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다가올 미래의 '창'이 아닐까.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지 않던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 만주족이 그러했고, 잉카족이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달이 차면 이지러지는 건 자연의 이치지만,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오롯이 군주와 백성의 몫이리라. 분단된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보며 답답한 마음을 달랜다.

강전섭 수필가

삼층 석탑이 저녁놀 속에 서서히 잠긴다. 쓸쓸했던 폐사지가 어머니 품속처럼 안온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유구한 역사 속 전설을 간직한 감은사지는 우리네 일상에 많은 것을 일깨운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역사의 뒤안길을 걸으며 선인의 숨결을 되새긴 뜻깊은 날이다.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 청주문화원 이사

▶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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