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대모산성(大母山城)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서울 강남, 양주, 순창, 진천 등지에 대모산성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할미산성’ 또는 ‘홀어미 산성’이라 불린다.
산성이 이렇게 불리는 것은 성의 축조과정에서 ‘남매축성설’ 등 여성이 꼭 등장하는 전설적 요인이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城)의 성(性)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속한다.
최근 진천 IC 확포장 공사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조사단장 김정기, 책임연구원 노병식)에 의해 긴급구제 발굴된 진천 송두리, 성석리 일대의 대모산성은 금강 상류지역에 일찍이 진출한 이른 백제시기의 문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4세기경, 미호천 일대의 곡창지대와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청주, 진천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강력한 철기문화로 기존의 청동기 문화 주체인 마한(馬韓)세력을 누르고 이곳의 정복자로 등장한다.
정복지에 토성을 쌓고 토기를 빚었으며 철광석을 생산하였는데 그러한 삶의 흔적들이 청주 신봉동, 진천 송두리, 삼룡리, 신수리, 석장리 등에 폭넓게 존재한다. 대모산성의 유구 및 유물들은 한성백제의 몽촌토성이나 한성백제 도읍지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발견된다.
이곳에서는 부뚜막편도 나왔는데 이는 풍납토성 3~4세기의 문화상과 엇비슷하다. 그러나 토기에 있어서는 한성백제의 문화상과 조금 다르다. 속이 깊은 바리형(鉢型) 토기라든지, 손잡이가 달린 토기 등은 청주 신봉동 보다 약간 이른 시기로 신봉동과 더불어 청주, 진천 등 금강 상류에서 발달된 4~5세기경의 이른 백제 문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모산성 밖에서 중점적으로 출토된 토기류는 박자(拍子), 도침(陶枕) 등 도구와 함께 나왔는데 도자기를 구을 때 베개로 쓰이는 도침은 도기(陶器)문화 발달과정을 잘 말해주는 증거다.
전체적으로 토기양상은 먼저 발굴된 진천 삼룡리, 신수리와 같은 형태며 청주 신봉동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어 원삼국 유적인 청주 송절동과 이른백제 유적인 신봉동, 그리고 미호천변의 정북동 토성과도 연관지어 종합적인 문화상을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철제 유물로는 홈자귀(有溝石斧) 등이 나왔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인근의 석장리 야철지와의 연관성을 따져봐야 할 일이다.
이 유적에서 또하나 특이한 점은 흑요석, 석기 등 구석기 유물이 나온데다 고토양층의 존재가 확인되어 이미 발굴됐던 장관리 유적과 더불어 미호천 상류지역에 발달했던 구석기 문화의 실체를 규명하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진흙으로 판축(版築)을 한 대모산성은 정북토성과 더불어 미호평야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 주변의 해자(垓子:적병 침입을 막는 성 주변의 도랑)와 집터, 기둥구멍, 화덕자리 등은 비옥한 땅을 일구고 가꾸던 이른 백제의 편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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