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의 꿈
난초의 꿈
  • 중부매일
  • 승인 2018.05.1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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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영춘일화인래백화개(迎春一花引來百花開)'라 하여 모든 꽃을 불러 모은다는 꽃, 영춘화(迎春花)가 노란 웃음으로 희망을 싹틔운다. 봄을 환영하듯 개나리보다 먼저 꽃샘추위에 피어나 경이로움을 준다.

무채색에서 도톰하게 살을 찌우며 유채색으로 변신을 시작한 매화와 서부해당화가 요염한 자태로 꽃망울을 품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미선나무, 수선화, 크로커스, 튤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랑을 머금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왕성한 생명력에 놀랍고 기쁨에 겨워 환호가 터지면서도 올봄은 예전과 달리 걱정이 앞섰다.

지난해 수해 입은 주차장 축대와 꽃이 있는 텃밭 꽃 뜨락을 복구해야 하건만 거금이 들어가는 만큼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해가 갈수록 일을 벌인다는 것이 무모한 것 같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봄볕이 무르익기 전에 공사를 시작해야 하건만 갈피를 못 잡고 고심했다. 문득 20여 년 전 여성 공무원으로서는 처음 도 교육청 핵심 업무인 수용계획 담당에 발탁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끊이지 않는 영전 축하 전화에도 수백여 명의 여성 공무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기쁨보다는 부담이 컸다.

걱정과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매일 야근과 특근을 해도 수용계획은 학교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숫자로만 되어있어 업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토요일 오후, 숫자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한참 동안 깨알 같은 숫자만 들여다보았더니 눈도 침침하고, 머리가 몽롱해져 커피 한잔을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환영이라도 하듯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간다. 비가 온 뒤 초록 물이 잔뜩 배어 있는 잔디는 마치 녹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이 아름답다. 크고 작은 나무들도 방금 목욕을 한 덕분인지, 색깔이 곱고 아름다워 신선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세상 욕심 다 버리고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만큼만 누리며 사는 정원 가족들에게 빠져들었다. 단풍나무가 곱디고운 옷맵시를 자랑이라도 하듯 예쁘게 왈츠를 추고, 옆에 있는 오엽송도 큰 어른답게 '어험!' 하며, 더덩실 춤을 춘다. 향나무도 향내를 살짝살짝 풍기며 춤을 추고, 다른 나무들도 향기에 취하고 멋에 취해 멋들어지게 향연을 벌인다.

연못의 물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여, 연못 가장자리에 붙여 놓은 정원석이 물속에 반사되어 아주 큰 호수를 연상케 한다. 유유자적 노닐던 연못 속의 비단잉어들도 경쟁하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춤사위를 벌인다.

연못 위에서는 고추잠자리들이 파란 하늘과 맑은 물을 벗 삼아 곡예비행을 펼친다. 벌 나비들도 제 세상을 만난 듯 춤사위를 벌이고, 이름도 모르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매미도 뒤질세라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한다.

봄에 식구를 늘린 까치 가족들도 목청껏 노래 부르고, 개구쟁이 청설모도 이 나무 저 나무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앙증맞은 묘기를 보여준다. 배롱나무도 화사한 꽃비로 축포를 터트리며 아름다운 한낮의 축제에 동참한다.

황홀한 축제를 관람하고 나니 인자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신사임당(정원에 있는 동상)께서 지혜를 주었는지, 엉킨 실타래가 풀린 듯 숫자가 눈 안에 쏙 들어왔다. 복잡하고 어렵게만 생각했던 고등학교수용계획을 마치고, 얼굴 가득 맑은 웃음 지었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미소 짓게 한다.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난과 같이 기품 있고, 고고하며 단아하게 살아가라고 지어주신 난초꽃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보면, 마음이 정갈해지고 용기와 에너지가 충전되고 있으니.

장고(長考) 끝에 주차장 축대도 다시 쌓고, 꽃 뜨락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건물 앞 잔디밭에 자그마한 꽃밭을 새로 만들고, 원래 꽃밭에는 흙덮기하여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행복한 쉼터가 될 수 있는 유실수와 잔디를 심기로 했다.

공사를 시작하니 우려와 달리 활력이 넘쳐났다. 남편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무거운 돌도 번쩍 들어 옮기고, 처음 해보는 곡괭이질도 어찌나 잘하는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축대 쌓는 일은 조경업자에게 맡기고, 화단 가장자리 자연석 쌓고 흙을 돋우는 일은 우리 내외가 직접 했다. 힘든 만큼 서로 살뜰히 챙겨 부부의 정은 더욱 도타워졌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막상 만들어 놓고 보니 비좁아 아쉽지만, 사계절 꽃을 볼 수 있게 물망초, 작약, 동자꽃, 꽃무릇 등 여러 종류의 야생화를 골고루 심고, 감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오데마리, 산사나무를 심었다. 고운 볕기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닦으며 하늘을 보니 해님도 빙그레 웃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정겨운 둥지, 새가 지저귀며 별도 달도 쉬었다 갈 수 있게 변하고 있는 모습이 어여쁘다. 가정의 달 5월, 홍화산사에 이어 서양분꽃과 오데마리 등이 꽃망울을 터트려 꽃내음이 진동한다. 할머니 손 잡고 온 아기부터 온 가족이 달달한 행복을 즐기는 모습이 훈훈하다. 꽃 뜨락이 누구나 행복을 충전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꿈이 이루어지고 있어 고맙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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