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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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평생교육원에서 정리정돈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필요한 물품과 필요 없는 물건을 분류해서 불필요한 물품을 버리거나 나누는 것을 정리라고 한다면 정돈은 필요한 물품을 제 자리에 가지런하게 놓는 활동이다.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가지지 않는 생활방식인 미니멀 라이프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는 요즘은 없어서가 아니라 넘쳐서일 것이다.

강좌가 동기 부여가 되어 정리정돈을 하기 위해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묵은 옷들은 그동안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아 그 빛깔마저 죽어가며 늙어서 나오는 것 같았다. 버릴 것과 살릴 것을 구분하며 옷들을 꺼내는데 구석에서 줄지어 서 있던 가방들이 풀썩 넘어진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가방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내는 가방들 사이로 아끼던 가방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든 가방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지퍼를 열자 누렇게 빛바랜 농협 봉투가 슬그머니 눈을 맞춘다.'이게 뭐지? 아 맞다. 이게 있었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봉투. 봉투 안에는 스물네 장의 만 원짜리 구권(舊券)이 들어 있었다.

뜻하지 않은 횡재는 나의 기억을 이끌고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대학생이 된 아들이랑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던 중에 눈길을 잡는 가방이 있어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것에 비해 유난히 가방에 욕심이 많던 나는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웅얼거림으로 터져 나왔다."제대로 된 가방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네. 우리 아들들 먼저 키워야 하니까"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나의 팔을 잡아 끈 것은 아들이었다. 멋쩍은 마음과 함께 그 일은 그렇게 잊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상기된 표정으로 의기양양 쇼핑백을 내미는 아들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내용물을 확인하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쇼핑백 안에는 언젠가 마트에서 욕심을 냈던 그 가방이 들어 있었다. 놀랍고 고마운 마음에 할 말을 잊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아들은 가방 속도 들여다 보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가방 속에는 지금은 구권이 된 만 원짜리 삼십 장이 들어있었다. 가방이나 지갑을 선물할 때에는 천 원짜리라도 넣어주어야 한다고 지나치듯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맏이는 타고난다고 했던가. 동생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장남이라는 짐을 짊어지는 큰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그런 아들이 방학 동안 틈틈이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벌은 돈을 엄마에게 모두 쏟아부은 것이었다. 자신이 준 용돈으로 예쁜 옷도 사 입으라고 말하는 아들의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고 감동스러워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흔적은 남기고 싶은 마음에 남편과 함께 삼만 원짜리 티셔츠를 사서 입고 뿌듯하게 다녔었다. 그러고 남은 돈은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서 은행에도 넣지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신권만 원짜리는 구권 지폐와 크기부터 차이가 난다. 세종대왕은 오만 원권에 밀려 그 가치마저도 다이어트를 한 듯 핼쑥한 모습이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던 빛바랜 봉투는 내게 있어서 힘이 되는 행복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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