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재료들 / 안희연

알약,
고요한 잠 속으로 떨어진다
하루가 참 깊구나
시간의 미끄럼틀을 타고

우물,
우물만큼 잠겨 있기 좋은 장소는 없다
이곳엔 웅크린 아이들이 많아
또박또박 슬퍼질 수 있으니까

너는 어느 계절로부터 도망쳐 왔니
너는 참 서늘한 눈빛을 지녔구나

나와 대화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거울을 믿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휘파람,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법이니까
번지기 좋은 이름이 되려면 우선
어깨를 가벼이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지

재봉틀, 이 시간을 모두 기워 입고서
비로소 내가 될 때까지

눈 내리는 밤,
아무도 밟지 않은 페이지를 골라
편지를 쓴다
"내가 그리로 갈게, 꼭 살아서 갈게"

다행일까 호주머니 속에서 손은 계속 자라고 있다
무엇도 쥐어본 적 없는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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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시인.
최호일 시인.

시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툭, 툭 모두 겨울의 재료들이다. 겨울은 잠을 자는 계절이며, 그곳은 우물 속처럼 외롭고 춥다. 그러기 위해서는 휘파람이라도 불며 재봉틀로 옷을 기워입고 자신을 달래야 한다. 그리고 멀고 따뜻한 대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내가 그리로 갈게, 꼭 살아서 갈게"추워서 호주머니에 들어간 손은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 그가 쥐고 놓지 않는 것은 겨울일까 봄일까. / 최호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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