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플랫폼 -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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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9.08.2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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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 / 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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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시인.
최호일 시인.

소동의 사전적 의미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술렁거림'이나 '분위기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다. 이 시의 화자는 관심을 끌기 위해 참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의 방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막힌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을 끌기 위해 폭력을 행하거나 도둑질을 하고 살인하는 것에 비하면,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 된 것이 아니고 얼마나 터무니없이 아름다운가! / 최호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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