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규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11월 첫 월요일 아침의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못해 우리의 전용도로 같았고, 안개가 걷히며 나타나는 산야에는 농익은 단풍이 흐므러지고 있었다.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서애 류성룡을 만나기 위해 하회마을, 병산서원, 봉정사, 도산서원을 유람하는 1천리 여정이다.

20년 전(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싶어 방문했던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의 정자 연좌루에 올라 강건너 부용대를 바라보니 산 밑 솔밭에 '옥연정사'가 아련하다.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 7년의 전란사 '징비록'을 눈물과 회한으로 쓴 곳이다.

안동에 왔으니 점심으로 '염장지른 고등어'를 기대만큼 맛있게 먹고 병산서원으로 출발했다.

얼마전 어느 한국사학자 교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 서원 중에 우선 탐방하기를 추천한 세 곳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한국 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최고의 경치와 건축 병산서원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한 폭의 그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 병산서원에 대한 찬사들이다.

8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진 7칸의 긴 누마루 건물로, 낙동강의 하얀 백사장과 병산의 풍경을 7폭 병풍에 담아내는 서원 최고의 건물인 만대루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강당인 입교당에 앉아 달래야만 했다.

"Excellent!" 지난 5월, 어머니에 이어 봉정사를 찾은 영국의 앤드루 왕자가 '봉정사 국화차'를 마시며 색과 맛에 반해 극찬했던 말이다.

봉정사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800년이 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극락전이 하나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자 영산암이 둘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고 보급한 국화차가 셋이다.

일찍 서두른 덕에 아침 안개 속에 잠겨있는 선경(仙境)같은 봉정사를 볼 수 있었다.

소나무, 바위, 화초, 석탑 등이 요모조모 어우러진 중정에서 '절집 마당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감탄하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이름의 우화루(雨花樓) 누마루에 앉아 국화차를 음미하니, 울긋불긋 단풍의 전경이 덥칠듯이 다가와 사람을 취하게 한다.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도산서원은 학문을 하고 우의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선생은 조선의 인문학자요 페미니스트였다. 26살 아래인 기대승, 35살 아래인 이 이, 41살 아래인 류성룡 등과 친구처럼, 사제처럼 학문을 논했다.

첫째 부인 사망 후 유배 중이던 권질의 부탁으로 온전치 못한 그의 딸을 재취로 맞고, 단양 군수 시절 만난 관기 두향과는 평생 플라토닉 사랑을 했다.

청상과부가 된 들째 며느리는 개가시켰고, 사돈가(家)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던 큰 며느리를 끔찍이 이뻐했다.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방(완락재) 안쪽에는 겨울에 매화분을 두었던 온실같은 공간이 있고, 도산서당 옆 매화원(梅花園)에는 471년 전 두향으로부터 받은 매화의 후계목인 듯한 백매들이 있어 더없이 반갑다.

220개 돌계단을 올라 퇴계묘소에 참배했다. 죽어서도 아버님의 혼을 모시겠다는 큰 며느리 봉화금씨의 묘가 100m 아래서 선생을 시봉(侍奉, 모시어 받듦)하고 있었다.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했던가! 매화향, 퇴계향이 누리에 그득하다.

사랑(愛)과 공경(敬)을 마음에 새기며 꿈같았던 여행을 맺는다.

김규완 충북중앙도서관장
김규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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