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산 밑에 집은 사계절 아늑하다. 그러나 낙엽 지고 가을바람이 부는 날은 마음까지 어수선하다.

하늘 향해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딴다. 이마엔 땀이 흐르고 소담하게 통통 살이 오른 감이 튼실하다. 항아리에 재워두어야겠다.

텃밭에서 무를 뽑고 무청은 줄을 매고 걸어 놓았다. 고추 잎을 따서 삶아 장독항아리 위에 널고, 풋고추는 짓 고추를 담았다. 동치미와 총각김치는 담아 냉장고에 넣었고 배추김치만 남았다.

가을엔 하루 벌어 열흘 먹고 산다는 엣 말이 있다. 밭에 있는 것 하나하나 집으로 끌어드리며 보람을 느낀다. 무서리가 내리기전에 늙은 호박과 애호박, 호박순까지 따다 저장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봄부터 물 주기 귀찮아서 밭에 심었던 화초를 화분으로 거실에 들여 놓으니 거실은 초원이 되었다. 먼지를 닦으며 요기저기 새롭게 겨울지낼 환경 정리를 한다. 매일같이 눈만 뜨면 바쁘다. 한옥이다 보니 문도 바르고 바람구멍을 막아야 겨울나기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집에 들인 정성을 말로 글로 어찌 표현 할 수 있을까. 정든 집이다. 1985년 2월 25일 공무원의 아낙으로 손톱여물 썰듯 알뜰하게 모아서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잘 지었다는 이집 주인이 되었다. 시멘트 380포를 들여 대대적인 집수리를 했다. 아이들 삼남매를 교통이 불편한 촌마을에서 대학을 졸업시켜 새 둥지로 떠나보내기도 했다.

집을 살 때도 오래된 한옥이라 했다. 젊은 날의 내 청춘을 불태우다 보니 이제 고희를 지나 망구의 나이를 향해 걷고 있다. 어쩌면 이집에서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테크노 단지 조성과 이런저런 사유로….

뒤뜰에 수령 150여년 된 조각자 나무는 바라만 봐도 웅장하다. 대대손손 바라볼 수 있게 보호수로 지정을 해놓을까.

샘가에 늙은 감나무며 엄나무 모과나무와 헛개나무, 오가피나무와 호두나무에 들인 정이 돈독하다. 정원의 장미와 목단. 능소화와 연산홍, 명자나무 등등 어느 것 하나 내 손길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이별을 떠 올리며 마지막 애정을 쏟아 붓는다. 지칠 줄 모르고 다듬고 또 다듬으며 애를 삭인다.

새집을 짓고 다 데려 갈까 하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니 어쩌란 말인가.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살면서 흙집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훈훈했다. 사는데 불편한 것이 없다. 보일러를 돌리면 찜질방이 된다. 우리 부부가 사는데 더없이 만족한 집이다.

또한 경로당이 옆에 있어서 심심치가 않다. 아침을 먹고 경로당을 가면 친구들이 많으니 외롭지 않았다. 이처럼 명당인 집을 어찌 떠나야 할까.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추녀 끝에 낭랑한 빗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집, 소나기 내리는 여름날에 행랑채 함석지붕위로 발장구치며 내는 빗소리는 난타소리를 닮았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면 부부가 마주앉아 차를 즐기며 달밤을 노래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별이란 슬프고 아쉬운 것,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이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하기만 한가. 마치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하듯이.

새 희망을 품고 떠나야 할 이별이지만 애틋하기만 하다. 겨울이 오면 동화 나라가 될 하얀 세상을 기다리듯 새롭게 펼쳐질 또 다른 내 집은 어디에 있을까.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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