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가경천변에 심긴 살구나무, 냇물을 향해 벋은 가지 중 하나가 바로 나다. 나무가 심긴 건 이십년이 넘었다는데 내 기억은 최근 몇 년 뿐이다. 해마다 되풀이되지만 올해는 유독 민망한 게 지나는 이들 불평이 예사가 아니다. 산책로에 떨어져 뒹굴다 발에 채이고 밟히는 살구가 너무 많다는 게다. 내가 보아도 어디는 심하긴 하다. 농약을 쳤으니 먹을거리로 할 수 없어 더하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털어가려 볼만한 광경이 만들어 질 텐데….

'조변석개'라더니 인심이 너무 다르다. 긴 잿빛 겨울 끝에 내 가지에 싹이 트고 하얗게 꽃이 피던 날에는 다들 화색이 도는 얼굴로 사진을 찍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노래하더니 그게 몇 달이 가지 않았다. 매년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내 가지의 열매를 살뜰하게 키워낸다. 이 일은 나 혼자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늘 아래 뭇 존재가 온 힘을 기울여 붉고 노란 열매를 만들어 내고도 푸대접을 받기는 이 곳이 유일하지 싶다.

어느 어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운다고 했다. 살구 열매가 익기 위해서는 비와 햇볕이 알맞아야 하고 땅이 영양소를 내주고 냇물에서 수분을 적절히 맞추어야 하니 얼마나 큰일이며 우주적인 일인가. 결실과 성숙의 서너 달 동안, 태풍이나 폭우라도 찾아오면 잎, 가지, 열매들은 서로를 지키려 필사적인 노력을 다한다.

잎들이 더욱 푸르러지고 열매가 굵어져 지나는 이들의 탄성이 늘어나면 열매에 서서히 붉고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다. 내 가지의 그들 살갗이 눈에 띄게 노랗게 변할 즈음 그들과 헤어질 순간을 예감하며 내 마음은 먹먹해지기 시작한다. 살구들 몸이 불고 묵직해지면 나를 붙잡는 힘이 조금씩 약해짐이 전해져 온다. 바람이라도 불면 비명과 울음소리가 높아지고 땅으로 곤두박질하는 살구들이 산책로에 늘어나, 호기심 많은 행인들은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고 더러 주워가기도 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통행인들은 짜증을 낸다. 가지들은 열매들이 도로위에 떨어져 타박상을 입는 게 애석하고 사람들 발에 채이고 밟히는 것이 마음아파 소리죽여 흐느껴 운다. 다행이 냇물 쪽으로 뻗은 내 열매들은 그런 흉한 일은 좀처럼 당하지 않는다. 너무도 다행이다.

도로위로 떨어져 다치고 이리저리 뒹굴다 채이고 밟혀 흉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느냐고 서러워하는 살구가 있다. 나는 작은 소리로 그를 위로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는 거야(生者必滅)', '사라지는 것 같지만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되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살았고 또 무언가를 살리는 것임을 설명하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그에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열매 맺길 원하지만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닌데, 너는 목적을 이루고 완주(完走)한 거라고 덧붙이곤 한다.

내 아래를 지나는 이들이 가끔 마라톤을 얘기한다. 그 긴 거리를 완주하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둑길에 흩어진 살구들이 그런 존재다. 먼 길을 다 달려 결승선을 통과한 후 쓰러져 숨을 고르는 마라토너의 모습이 뒹구는 살구에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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