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수필가

칠월 초하루다. 폭염 주의보에 위로하는 듯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는 갈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기상 이변으로 쏟아 붓던 폭력적이던 비는 산 넘어 간 것 같은데 사회적 거리두기는 2단계로 조였다. 그동안 적당히 조심하면서 마치 바이러스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처럼 나다닌 것을 많이 반성하면서 외출을 취소했다. 땅이 너무 질어서 뽑지 못했던 텃밭에 호미 들고 앉았다. 이게 무슨 조화야? 오늘은 땅이 단단해서 호미가 튄다. 게다가 툭하면 풀독으로 애를 먹는 말썽꾸러기 피부가 걱정이지만 풀들은 숲을 이루고 있으니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전쟁터로 향하는 병정처럼 무장하고 비장한 각오로 폴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해가 뜨면 휴전이라고 스스로 약속을 했으니 땀이 제아무리 방해를 해도 아랑곳없다. 옷이 점점 젖어가면서 슬슬 아침밥이 아롱거리자 조금씩 생각이 방향을 돌린다. 해야 솟아라, 어서어서 솟아라. 오늘따라 어찌 이리 늦은가 싶어서 잠시 허리를 편다는 핑계로 동녘을 향해 일어섰다. 그럼 그렇지, 해가 뜨지 않은 게 아니라 무슨 심술로 짙은 안개가 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호미를 놓아도 약속은 지키는 것이다. 장갑 벗고 토시만 벗어도 갈바람이 속까지 시원하게 식혀 준다.

가을이 오려고 서풍이 불면 곡식들이 놀랄 정도로 빨리 자라고 익어간다고 해서 '갈바람에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는 속담까지 있다. 허나 야속하게도 곡식보다 잡풀들이 앞질러 햇살도 더 받고 갈바람도 더 받아 풀씨들이 더 빠르게 영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렁주렁 달린 호랑이 콩이 풀이 우거져서 썩고 있다. 장마 핑계로 풀을 뽑아내지 못한 탓이지만 풀도 장마도 내 피부도. 다 지겹다.

생존경쟁에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인격도 양심도 시대에 따라 융통성이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이기고, 차지하는 사람들은 텃밭에 잡풀처럼 다 잘 살고 있다. 아무리 정당해도 패자의 말은 들어 주지 않는다.

축구 경기 중계를 보다가 어쩌면 인간 세상 삶의 현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반칙도 기술이다. 빙판에서 김동성을 억울하게 실격시킨 오노처럼 너무 티 나는 할리우드 액션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니 불명예스럽다. 그러니 적당하게가 기술이다.

이미 그 기술로 유명해진 세계적 선수도 많은 것처럼 정치 경제 심지어 예술분야까지 뻗고 있는 기술이다. 뻔뻔해야 정치를 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그 뻔뻔함에다가 연기도 잘하며 융통성 있는 거짓말과 지하조직도 엮을 줄 알아야 표식 동물이 될 수 있다.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야 되며 얼마나 초조함과 불안함을 안고 살까.

나는 이대로가 좋다. 부자가 아니라도, 유명 인이 아니라도 좋다. 텃밭에서 적당히 땀 흘리고 갈바람을 고마워하며, 샤워기 들고 콧노래 흥얼거린 후, 아침밥이 꿀맛 같은 이대로가 좋다.

소설가 선배 선생님이 직접 덖어 말린 뽕잎차 향기에 글감을 얻어 노트북을 열었다. 서쪽 창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폭염 뉴스를 민망하게 한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창밖 나뭇가지들이 동쪽으로 기울며 너울거리는 건 확실한 갈바람이다. 들에는 벼이삭이, 산기슭 밭에서는 콩과 참깨들이 알차게 익으라고 찾아주는 반가운 바람이다.

이렇게 평화롭고 보람된 하루의 시작을 잠시 괜스레 엉뚱한 생각으로 장마 탓, 폭염 탓, 바이러스 탓을 했다. 주변 환경이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나다. 내 본분만 지키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면 세상 무엇도 탓할 필요 없이 평화롭다. 뿐만 아니라 땀과 갈바람의 맛을 알게 되고 그 맛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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